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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시스, 배철현의 비극읽기] 삶의 길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그것은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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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시스, 배철현의 비극읽기] 삶의 길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그것은 죄다

입력
2017.05.0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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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세기쯤 그리스 에보이아 섬에서 발견된 그리스 항아리 앙포라에 그려진 그림. 테베의 왕 카드모스와 용의 대결을 묘사하고 있다.
기원전 6세기쯤 그리스 에보이아 섬에서 발견된 그리스 항아리 앙포라에 그려진 그림. 테베의 왕 카드모스와 용의 대결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 비극은 아테네인들에게 자기 자신을 제삼자의 눈으로 보는 수련이었다. 자신이 자신에게 제2의 자아가 되어 섬세하게 살펴보아 ‘실수’하지 않는 공동체 훈련이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최고의 가문에서 태어난 영웅이 비극적인 인간으로 타락하는 계기를 ‘실수’라고 말한다. ‘실수’란 행위자가 의도하지도 의식하지도 않았지만, 한 순간의 오판으로 자신이 상상하지도 못한 엄청난 결과를 불러오는 불행의 씨앗이다.

너의 길을 알고 있느냐? 비극의 질문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수’를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hamartia)라고 불렀다. ‘하마르티아’는 ‘자신이 당연히 가야 하는 정해진 길로부터 이탈하다 ; 길을 잃고 헤매다’라는 의미다. 비극적인 인간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길을 순간의 실수로 걸어가게 된다.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그런 작은 실수를 저질러 파국으로 달려가는 주인공을 보고, 그런 일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공포’와 주인공에 대한 ‘연민’을 마음 속에 일으킨다. 주인공의 ‘오만’은 그를 ‘장님’으로 만들어 헤매게 만든다.

고대 이스라엘인들도 자신에게 주어진 길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고, 그 길에 들어섰더라도 게으름을 피우는 행위를 히브리어로 ‘하타’(hatah)라고 말한다. ‘하타’는 하마르티아와 유사하게 ‘길을 잃다’라는 의미와 함께 종교적으로 ‘죄를 범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죄’의 원래 의미는 십계명과 같은 규율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무이한 삶의 정도를 알지 못하고 그런 길이 없다고 주장하는 무식(無識)이다.

그리스 비극은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 따라오는 실수에 관한 경고다. ‘시작’은 폭력적이다. ‘시작’엔 이전(以前)과의 매정한 단절, 이후(以後)에 대한 비전과 희망, 그리고 지금과 여기에 대한 확신과 집착이 혼재한다. 인류가 문명을 발견하면서, 이전의 습관과 세계관으로부터 결별해야 했다.

인류 최초의 도시는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우룩’이다. 고고학자들은 우룩을 발굴하여 우룩 제4지층(기원전 3,300년)에서 정교한 신전과 도시의 중심인 아크로폴리스를 발견하고 인류 최초의 문자인 수메르어 토판문서를 발굴하였다. 우룩의 탄생은 ‘형제살해’라는 야만과 깊이 관련되어있다. 이 이야기는 고대 근동지방에 널리 회자되어, 심지어는 한 유대인 작가가 ‘창세기’ 4장에 그 사건을 기록하였다. ‘창세기’에 의하면 신이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였고, 아담과 이브는 쌍둥이 형제 ‘가인’과 ‘아벨’을 낳았다. 가인은 농부가 되었고 아벨은 유목민이 되었다. 신이 아벨과 아벨이 준비한 희생제물을 선호하자, 가인은 이를 시기한다. 가인이 한 순간에 화가 치밀어 아벨을 들판에서 살해한다.

인류 역사는 형제살해로 시작한다. 그 후 가인은 ‘에덴의 동쪽’인 ‘노드’에 거주한다. ‘노드’(nod)는 히브리어로 ‘방랑’이라는 의미로 특정한 장소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 가인이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 다녔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야만적인 에덴의 동쪽, 그 이름은 카드모스

가인의 최초 정착지는 ‘에덴의 동쪽’이다. ‘에덴’이란 단어는 ‘계곡 사이 평원’을 의미하는 수메르어 ‘에딘’(edin)의 차용어로, 이상적인 파라다이스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동쪽’이란 단어는 그리스의 가장 오래된 도시인 ‘테베’와 깊이 관련이 있다. ‘에덴의 동쪽’은 히브리어로 ‘키드마트-에덴’(qidmat-eden)이다. ‘키드마트’는 ‘케뎀’(qedem)이란 단어와 어원이 같다. 지난 주 글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테베를 세운 전설적인 인물이 바로 히브리어 ‘케뎀’을 그리스식으로 전환한 ‘카드모스’(kadmos)이다. ‘창세기’에서 인류 최초의 도시를 건설한 인물은 가인의 아들인 에녹이다.

카드모스는 제우스가 납치한 유로파를 찾으러 그리스로 넘어온다. 그는 델피에서 한 암소를 따라가다가 암소가 멈추는 장소에 도시를 세우라는 신탁을 받는다. 그 도시가 바로 테베였다. 그는 암소를 희생제물로 바치기 위해, 신하들에게 근처 우물에 가서 물을 가져오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그 우물에는 사람들을 수없이 죽인 용이 있었다. 카드모스는 용을 살해한 후, 아테네 쪽을 향해 용의 이빨들을 땅이 뿌렸다. 이것들이 땅에서 싹을 내어 무장한 용사 형제들이 나오자, 카드모스가 돌을 던졌다. 이 용사들이 결사항전을 하다 다섯 명이 생존하였다. 이렇게 ‘뿌려진 인간들’인 ‘스파르토이’가 테베의 원주민이 되었다.

테베에는 그 도시의 창건자인 카드모스의 이름을 딴 성벽과 아크로폴리스가 있다. 바로 카드메아(Cadmea)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트로이전쟁 이전인 기원전 15세기 미케네 시대부터 거주하였다. 아테네인들에게 테베는 완전한 그리스가 아니라, 오리엔트의 야만성이 숨어있는 도시다. 테베는 자신들이 실험하고 있는 민주주의를 정착시키지 못하고 왕정과 폭정, 무법과 무질서, 근친상간과 같은 성적인 문란, 그리고 부모 살해, 자식 살해, 그리고 형제 살해가 판치는 복마전(伏魔殿)의 본거지다. 아테네가 문명이 정착된 도시라면, 테베는 야만에서 문명으로 이행과정에 있는 무시무시한 경계로 문명이 발흥하지 못하도록 높은 성벽을 쌓은 도시다.

테베가 낳은 비극의 신 디오니소스

그리스 비극들은 아테네에서 매년 봄에 거행된 디오니소스 신을 위한 축제인 디오니시아에서 공연되었다. 디오니소스는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중간적 존재인 ‘괴물’과 같은 존재다. 그의 어머니는 테베 카드모스왕의 딸 세밀레와 하늘신인 제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반신반인(半神半人)이다. 디오니소스는 포도 추수와 와인 제조를 관장하는 신이며, 풍요와 황홀경을 유발시키는 신이다. 그는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제 삼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수련을 위한 문화인 비극의 신이기도 하다. 그는 아테네 종교에서 중요한 12명의 올림피아 신들 가운데, 유일하게 인간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난 신이다. 디오니소스를 테베 출신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테베는 북서쪽으로 50㎞ 떨어진 도시 아테네와 그리스 패권을 놓고 경쟁했던 도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일곱 성문을 가진 테베’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테베와 아테네의 갈등은 아테네와 페르시아 제국간의 마지막 전쟁인 기원전 479년 ‘플라티아아 전투’에서 악화되었다. 테베가 페르시아 제국을 위해 아테네와 싸웠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인들은 호메로스의 ‘트로이 전쟁’ 서사시처럼, 테베에 관련된 서사시인 ‘테바이드’(Thebaid)를 잘 알고 있었다. 테바이드는 기원전 750년에서 500년 사이에 그리스인들에게 회자되던 네 개의 잃어버린 서사시들이다. 테바이드의 중심은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니케스의 형제 살해 이야기다.

테베의 왕 라이오스가 까맣게 잊어버린 실수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테베를 공격한 일곱 장수들’은 기원전 467년 디오니소스 축제 때 아테네 원형극장에 올려 우승한 트리올로지(세 편의 비극) 중 세 번째 비극이다. 이 비극은 폴리니케스가 이끄는 아르고스 군대와 에테오클레스가 이끄는 테베 군대가 테베의 성벽에서 대결한 이야기를 다뤘다. 트리올로지의 첫 두 비극인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 네 번째 사튀로스 극인 ‘스핑크스’은 남아있지 않다. 남아 있는 ‘테베를 공격한 일곱 장수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폭력과 분노로 가득 차 있다.

테바이드는 라이오스의 실수로 시작한다. 라이오스는 오이디푸스의 아버지며,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니케스의 할아버지다. 라이오스는 카드모스의 손자다. 카드모스의 아버지이며 테베의 왕인 라브다쿠스가 죽자, 리쿠스가 대신 왕이 되어 라이오스를 키웠다. 라이오스가 아직 어렸을 때, 쌍둥이 형제 암피온과 제투스가 테베의 왕 리쿠스를 죽이고 왕좌를 차지하였다. 테베 시민들은 라이오스를 보호하기 위해 그를 도시 밖으로 빼돌려 펠로폰네소스 지역에 있는 피사라는 도시의 펠롭스 왕에게 보낸다.

라이오스는 올림픽 경기가 열리는 피사에서 펠롭스의 사생아 크리시포스의 스승이 된다. 크리스포스는 스승 라이오스와 함께 네메아로 전차경주에 참가하기 위해 여행한다. 그러나 라이오스는 오히려 크리시포스를 납치하여 테베로 데려가 그를 강제로 추행한다. 크리시포스는 죄책감에 시달려 자살한다. 그 동안 테베의 왕 암피온과 제투스가 죽고 나서, 라이오스는 테베의 왕이 된다. 라이오스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약자를 겁탈한 사건을 기억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 범죄는 테베와 라이오스 가문이 3대에 걸쳐 저주를 받는 계기가 되어 가문을 전멸시켰다. 라이오스의 한 순간의 실수,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어 크리시포스를 겁탈한 사건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순간의 실수는 치명적이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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