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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회 칼럼] ‘교육 사다리’와 ‘교육 나무’

입력
2017.07.31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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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의 교육 정책 근간이 수립됐다. ‘유아부터 대학까지 교육 공공성 강화’, ‘교실혁명을 통한 공교육혁신’, ‘교육의 희망 사다리 복원’, ‘고등교육의 질 제고 및 평생․직업교육 혁신’ 등이 그 주된 내용이다.

여기에 김상곤 교육부총리가 지난 7월 5일 취임사에서 밝힌, ‘교육 사다리 복원을 통한 공평한 학습사회 구현’, ‘특권과 경쟁 만능으로 불행한 교육체제 개혁’, ‘보편교육 체제의 확고화’, ‘아이들의 행복한 성장과 교육 민주화 실현’ 등의 정책 의제를 더하면 새 정부가 지향하는 교육 목표를 충분히 읽어낼 수 있다. 공교육 개혁을 통한 민주적이며 행복한 교육의 구현이 그것이다. 녹록하지 않은 난관과 저항이 있겠지만 소기의 목적이 이뤄지길 고대하는 시민이 훨씬 많으리라 사료된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사다리’란 표현이 그것이다. 왜 꼭 사다리란 표현을 썼어야 했을까. 주지하듯 사다리는 오르거나 내려가는 데 쓰는 도구다. 그러나 사다리를 보면 올라가고자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자칫 민주적이고 행복한 교육이 어딘가로 올라서기 위한 수단으로 읽힐 수 있는 대목이다. 민주화가 수평적 질서의 창출을 지향함에도, 또 취임사에서 “사회적 불평등과 경제적 불평등을 축소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교육의 기회를 균등하게 하는 것”이라고 단언했음에도 말이다. 교육을 은연중에 신분 상승이나 부와 권력 획득의 수단으로 보는 뿌리 깊은 ‘집단 무의식’이 여전한 듯싶다. 누구나 다 희망 사다리를 지니면 틀림없이 더 높은 곳에 오를 수 있는 사다리가 출현, 이를 선점하기 위한 승자독식 형 경쟁이 지속될 듯싶어 우려되는 까닭이다.

교육은 비유컨대 숲이라는 교육 생태계서 나무를 자라게 하는 일이다. 식물원이나 정원을 가꾼다는 것이 아니다. 자연 상태 그대로 내버려두면 알아서 나무가 자라나고 숲이 생긴다는 뜻도 아니다. 해방 직후나 6.25동란 이후처럼 민둥산일 때는 식목과 조림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단 나무가 자라 숲이 조성되면 그것은 자가 조직과 자기 조절 능력을 갖춘 독자적 존재로 거듭난다. 햇빛과 공기와 물 같은, 비유컨대 공공재만 원활하게 공급되면 숲은 자족적으로 생존한다.

이는 숲이 나무를 지배하지도 않고 나무가 숲을 위해 존재하지도 않기에 가능했다. 다만 숲이 나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필연이다. 이런 조건에서 나무는 갖은 모습으로 성장하며 저마다의 역능을 뽐낸다. 그러면 우리는 나무들이 내는 온갖 산물을 사용하며 삶을 유지하고 사회를 꾸려간다. 물론 나무가 우리를 위해 그것을 생산해내는 건 아니다. 자기 생존을 위해 벌인 활동의 결과물이 우리에겐 소중한 자산이 됐을 따름이다.

이렇게 ‘나’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활동을 했을 뿐인데 그 결과가 주변엔 선물이 되는 기적, 이것이 자율적이며 자족적인 나무가 지니는 참 면모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자율적이고 자족적이어야 하며 결코 다른 무엇을 위한 사다리여서는 안 된다. 민주적이고 행복한 교육 생태계의 건설이란 새 정부의 교육 정책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바도 이것이다. 유아부터 고등교육에 이르기까지 각 단계의 교육은 그 단계서 자율적이고 자족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가령 중등교육은 인문적이고 민주적인 삶을 구현하고 그 결과에 온전히 책임질 줄 아는 시민 양성이란 목표 실현을 위한 자족적 중등교육 생태계여야 한다는 뜻이다.

새 정부의 교육 개혁이 난관에 부딪힌다고 해도, 적어도 중등교육만큼은 꼭 제대로 된 자족적 교육 생태계로 바꿔야 한다. 소위 ‘4차 산업혁명시대’, 중등교육은 교육 생태계의 허리로서 그 역할이 몹시 강화될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기 위해선 중등교육은 중등교육 생태계에 일임하고 정부나 사회, 대학 등은 그곳에 공공재를 대는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그 첫걸음은 대학입시를 담대하게 무시하기다.

시험을 없애자는 제안이 아니다. 시험은 여러 가지 교육 수단 가운데 하나여야지, 달리 말해 교육을 위해 시험이 존재해야지 시험을 위해 교육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수능 같은 시험은 중등교육의 완성 단계서 그것의 갈무리를 위한 점검으로서 치러져야 한다. 프랑스나 독일의 바칼로레아나 아비투어처럼 ‘고등학교 졸업 자격시험’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따라서 이런 시험은 중등교육과정 교사가 기획부터 출제, 채점, 평가에 이르는 전 과정을 주도해야 한다. 그러려면 교사의 역량이 한층 강화돼야 한다. 프랑스, 독일의 중등교육과정 교사 상당수가 해당 분야의 박사학위를 소지하고 있는 이유다.

교과서도 없어져야 한다. 도구적 지식 습득을 위한 과목을 제외한 나머지 과목에선 교육 선진국처럼 ‘체계적으로 구조화된 동서고금의 좋은 책들의 집합’으로 교과서를 대신하자는 것이다. 그래야 민주적 제 가치와 행복을 삶의 우선순위에 놓을 줄 아는 힘을 지니게 된다. 어디에 더 오르기 위한 힘이 아니라 자율적이고 자족적 삶을 펼쳐내는 힘 말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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