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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판에 판치는 진정성 타령… 이제 그만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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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판에 판치는 진정성 타령… 이제 그만하시죠

입력
2016.02.12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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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판서 반복되는 진정성 발언은

‘진짜 원조’ 주장 같은 말장난일 뿐

진정성 찾기는 환멸과 모험의 반복

우리 스스로를 향한 믿음이 중요

진보란 이름의 파랑새는 멀지 않아”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앤드류 포터 지음ㆍ노시내 옮김

마티 발행ㆍ336쪽ㆍ1만6,000원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노무현 정부의 모든 것을 혐오할 것만 같은 박근혜 정부가 고스란히 따라 하는 게 하나 있으니 바로 ‘진정성의 정치’다. 지난해부터 진정성을 내세운 호소를 이어가더니 4월 총선을 앞두고서는 ‘진실된 사람’을 호명했다.

그런데 ‘진실된’, ‘진정한’ 같은 표현은 무척이나 모호하다. 모두들 자기는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도 남들이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단어라서다. 냉소적인 게 아니다. 제각각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 한판 붙기 위해 스크럼을 꽉 짜둔 냉엄한 현실정치세계에서 ‘내 마음을 알아주세요’라는 호소는 아마추어나 하는 짓이다. 아니면 더 교묘한 함정이던가.

때문에 노무현 정부 때 이미 진정성의 정치에 대한 비판은 풍성했다. 정치의 실패를 자인하는 꼴이라는 지적에서부터, 진정성이라는 게 결국 1980년대 주사파의 품성론과 뭐가 다르냐는 색깔론적 분석에다, 이제는 온 국민이 궁예의 관심법을 익혀야 하는 거 아니냐는 비아냥까지 나돌았다. 그나마 진정성 타령이 호소에 그치면 짜증 좀 내고 말면 그만이다. 진정성을 내세워 상대를 압박하고 상대에게 분노한다면? 진정성이 최악으로 치닫는 경우다.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은 진정성을 잃은 이 시대에 정말로 진지한 진짜 진지성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얘기는, ‘원조’를 넘어 ‘진짜 원조’에 ‘원조의 원조’를 거듭하는 식당 간판 마냥 쓸데없는 말장난이라 질타하는 책이다.

저자는 오늘날 정치가 진정성을 잃은 원인은 진정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바로 그 진정성 타령 때문이라고 본다. 현실 정치 세계가 모조리 썩었으니 진정한 정치인을 보고 싶다고 모두가 합창하기 시작하자, 실제로 나타난 건 세심하게 기획 연출된 진정성이다. 가끔 새로운 정치를 선보이겠다 주장하는 이들이 나타나 신선한 언행을 선보이지만 이런 특성들은 “언론이 솔직한 언사를 결례라며 비난할 때쯤” 잠잠해진다. 그게 아니라면 희한한 사고뭉치나 극단주의자처럼 비쳐지는 걸 감수해야 한다. “우리는 정치에 진정성을 바란다고 말하지만 정작 현실이 닥치면 우리의 협소한 가치관과 이상을 반영하는 진정성만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러다보니 정치인들에게 진정성을 그토록 갈구했음에도 정치판을 움직이는 이들은 기획자, 전략가, 연출가들이다. 사람들은 다시 이걸 가지고 진정성이 사라졌다 아우성치니, 이젠 기획, 전략, 연출은 음지로 숨어야만 한다. 세련되고 자연스러운 것 못지 않게 어떻게 하면 안 들킬 것이냐는 점도 중요해진다. 이건 진정성 찾기 놀음의 악순환이다. 이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법은 뭘까. 저자의 대답은 간단하다. 거꾸로 가면 된다. 진정성 타령이나 늘어놓는 정치인을 버리고, 사실관계와 이에 따르는 정책대안을 고지식하게 읊어대는 “뻣뻣하고 정직하고 너무나 따분한” 정치인에게 표를 주는 것이다.

이쯤이면 짐작할 수 있듯,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저자의 수다다. 진정성 문제는 신의 죽음 이후 나타난 근대의 증상이다. 신이 사라진 공백을 위대한 인간 영혼의 아우라 같은 것으로 꾸역꾸역 채워 넣은 게 진정성이다. 당연히 정치 뿐 아니라 철학, 미술, 문학, 라이프스타일 등 현대사회의 모든 분야에 침투해 들어갔다.

이 정도면 예상할 수 있듯 책에는 장 자크 루소에서부터 해롤드 블룸, 루이스 멈포드, 발터 벤냐민 같은 근엄한 지식인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책이 무겁지 않은 것은 영화 매트릭스, 오프라 윈프리쇼, 데미언 허스트의 작품 ‘살아있는 자의 마음 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 같은 것들을 산뜻하게 버무려놓은 저자의 필력 때문이다. 폭로, 고발보다는 유머와 위트가 넘친다. 빠르고 재미나게 읽힌다.

진정성은 환멸과 모험의 반복이다. 급한 대로 신 대신 사람으로 채워 넣었다지만, 결정적으로 사람은 신만큼 완벽하지 못하다. 환멸은 반드시 찾아오고, 그러면 이제 또 다른 모험에 나설 때다. 사실 진정성 자체는 나쁘지 않다. 참된 그 무엇에 늘 허기져 있는 게 인간 삶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진정성이 신의 대체재다 보니 이 과정이 지나친 종교적 열정에 휩싸이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저자의 제안은 그 열정을 진정성 찾기 모험 대신, 우리 스스로를 믿는데 써보는 데있다. 세상에 문제가 없다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진정성 없는 삶을 사는 건 항상 남들이나 하는 짓이고 이 세상에 진정성 없어 보이는 것들이 어쩜 이렇게 많으냐”며 분노하기보다는 “인류가 장애물을 만나도 이성과 창의력과 선의로 해결할 수 있다는 소박한 믿음”을 갖자는 것이다. 진정성의 신적인 힘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판돈을 걸어보자는 얘기다. 저자는 그 믿음에다 ‘진보’라는 이름을 붙여뒀다. 늘 그렇듯 파랑새는 멀리 있지 않다.

조태성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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