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자 모르는 시각장애인 위해
시민의 자유로운 메시지 담아
참여형 오디오북 제작 결심
경복궁역 2번 출구 전화부스가
노란 외관의 녹음실로 탈바꿈
자금문제로 장비는 이달 설치
26일 오후 지하철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 앞. 인도 한 구석 노란색 공중전화부스가 유독 눈에 띄었다. ‘우리는 모두 책을 읽을 권리가 있다’는 검은 글씨가 덮여 있는 외관은 여느 부스와 달랐다. 이곳 이름은 ‘글소리부스.’ 시각장애인을 위한 오디오북을 만드는 곳이라는 의미다. 책상과 의자가 놓인 좁은 내부 공간에는 무언가를 종이에 열심히 쓰고 있는 한 남성이 있었다.
전업작가인 김민관(31)씨다. ‘슈퍼맨로망스’(2012)라는 단편집을 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이후 페이스북 페이지에 짧은 글을 연재하는 작가 모임인 ‘라이터스’(writers)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김씨는 “5년 전 휴대폰을 없앤 뒤로 공중전화를 찾아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거의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는 부스 활용방법을 고민하게 됐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떠올린 아이디어가 글소리부스다. 지난해 점자책을 만들어 기증하는 과정에서 ‘점자를 읽지 못하는 시각장애인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이들을 위해 글을 오디오북으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고, ‘시민들도 제작에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도 이어졌단다.
다행히 부스를 관리하는 KT링커스가 “전화부스를 글을 쓰고 녹음하는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다. 국립서울맹학교와 인접(도보 10분)한 거리에 있는 지금의 부스가 그에게 주어져 5월부터 문을 열었다.
김씨는 “이용방법이 간단하다”고 했다. 그저 자유롭게 글을 쓰고, 녹음만 하면 된다. 녹음파일이 어느 정도 쌓이면 오디오북으로 제작된다. 일주일에 약 100건 정도 글이 남겨지는데, 오디오북으로 만들 수 있는 글보단 낙서가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해도 쓰는 이의 진심이 담긴 글이, 듣는 사람 마음에 가장 잘 닿을 거라 알려드릴 뿐 따로 어떤 글을 남겨달라고 하진 않아요.”
고민은 역시 돈이다. 서울시 지원금도 받고 크라우드펀딩의 힘도 빌리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사비를 쓰게 된다. 그는 “녹음기도 문 연지 두 달이 다 돼서야 50만원 들여서 겨우 마련했다”며 “성능이 좋진 않지만 이달 중순부터 이용이 가능하다”고 했다. 시민들이 몰래 가져간 연필과 종이를 채워 넣는 일, 부스에 버려진 쓰레기를 치우는 일 등 챙겨야 할 게 많다.
김씨는 “전국에 글소리부스를 설치하고 싶다”고 했다. “글소리부스가 곳곳에 설치되면 산책 나간 김에 잠깐 들러 누군가를 도울 수 있으니까. 세상이 좀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요?”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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