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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웃을래, 안 쓰고 맘 졸일래

입력
2015.08.2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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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에 짜증을 잔뜩 담아 아버지를 본다. 말 한마디 없어도 메시지는 분명하다. ‘헬멧 쓰세요’ 아버지가 구석방에서 자전거를 꺼내 좁은 복도를 지날 때도 전투는 계속된다. 이게 몇 번째인지. 불만 가득한 입술이 달싹이지만 휴일 말다툼만은 피하자. 대신 지긋이 본다. 아버지 당신이 못 이기는 척 헬멧을 쓸 때까지. 오, 이제 쓰시는구나, 아닌가? 지금 쓰시려는 거 아닌가? 혼란을 틈타 은근슬쩍 현관에 다가서는 아버지. 터진다, 오늘도 속 터진다. “아, 헬멧 왜 안 써요? 집에 헬멧 천지인데 왜 안 써요?”

지난해 아버지와 달렸던 한강. 끝끝내 헬멧 대신 모자를 쓰셨다. 아들 성화에 요새는 헬멧을 쓰신다.
지난해 아버지와 달렸던 한강. 끝끝내 헬멧 대신 모자를 쓰셨다. 아들 성화에 요새는 헬멧을 쓰신다.

● 머리칼이 바람에 날리는 즐거움, 저도 알아요

아버지만이랴. 대한민국에선 자전거 헬멧 쓰는 사람이 드물다. 15일 오후 서울 송파사거리. 카페 창가에 앉아 1시간을 관찰한 결과, 사거리를 지난 자전거 운전자 122명 중 헬멧 쓴 사람은 10명뿐이었다. 짐받이에 짐을 가득 실은 노인부터 보조석에 어린아이를 태운 여성까지 맨머리로 용감하게 도심을 누빈다. 국내 헬멧 착용률이 8~10%라는 정부ㆍ연구기관 통계와 얼추 맞는 수다.

왜 안 쓸까? 아버지는 헬멧이 덥고 답답하시단다. 친구들이 털어놓은 이유도 비슷하다. 오래 쓰면 뒷목이 뻐근하다, 자전거에서 내리면 간수하기 귀찮다, 폼이 안 난다 등등. 헬멧 착용을 권했다가 욕도 먹는다. “집 앞에 반찬 사러 가는데 헬멧까지 써야 되냐? 한강에서 과속하는 사람들한테나 필요하지!”

결국 헬멧 혐오의 밑바닥엔 ‘사고가 안 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다치고 싶은 사람은 없다. 다만 자신은 자전거에 익숙하고 느리게 타니 헬멧이 필요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자전거가 주요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은 유럽 사회는 헬멧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볼멘소리도 뒤따른다.

실제로 자전거 선진국 네덜란드에선 헬멧을 쓰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 통계만 따지면 국민 모두가 자전거를 한대씩 갖고 있고 1인당 하루 자전거 주행거리가 3km에 이르지만 헬멧 쓴 사람은 별종 취급을 받기 일쑤다. “헬멧을 쓰느니 옷을 벗고 학교를 갈 것”(일간 인디펜던트) “거리에서 보이는 헬멧족의 정체는 미국인 선교사”(treehugger.com)라며 웃어넘기는 반응을 쉽게 본다. 유럽 쪽 자전거 웹사이트들을 보고 있으면 ‘안전하게만 타면 헬멧이 필요 없지 않나?’ 하는 마음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헬멧에 대한 저항은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진다. 스페인에선 정부가 헬멧 착용을 의무화하려는 데 반발하는 시위가 있었다. 자전거 단체들은 “헬멧 의무화 국가에서 머리 부상은 줄어들지 않았다”는 주장을 펼친다(European Cyclist’s Federation). 원초적 즐거움, 편한 자전거 이용에 대한 열망은 한국 이야기만이 아니다.
헬멧에 대한 저항은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진다. 스페인에선 정부가 헬멧 착용을 의무화하려는 데 반발하는 시위가 있었다. 자전거 단체들은 “헬멧 의무화 국가에서 머리 부상은 줄어들지 않았다”는 주장을 펼친다(European Cyclist’s Federation). 원초적 즐거움, 편한 자전거 이용에 대한 열망은 한국 이야기만이 아니다.

● 대한민국에 살고 있기에

그러나 거리로 나서면 헬멧 생각이 절실하다. 자전거도로로 치고 들어오는 버스에 놀라 인도로 쫓겨가며 새삼 자전거 문화 후진국에 살고 있음을 느낀다. 내가 사는 동네는 수년의 투자 덕에 자동차도로를 한번도 밟지 않고 자전거를 탈 수 있을 정도로 전용도로가 널리 깔렸지만 싫어도 자동차들과 함께 달리는 경우가 많다. 자전거도로를 점령한 차들 때문이다. 보행자들도 널찍한 인도 대신 자전거도로로 오간다. 붙잡고 물어보니 보도블록보다 걷기 편하기 때문이란다. 때론 차라리 모든 길을 자전거도로처럼 포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자전거도로에 주차된 차. 멀리 자전거 도로로 오가는 사람들도 보인다.
자전거도로에 주차된 차. 멀리 자전거 도로로 오가는 사람들도 보인다.

도심 라이딩의 괴로움은 말할 것도 없다. 사람들이 붐비는 인도를 피해(인도 주행은 원래 불법) 일반 도로를 달리면 쌩쌩 지나는 자동차에 신경이 곤두선다. 최대한 도로 가장자리로 달려도 무엇이 불만인지 경적을 울리며 바싹 붙는 승합차. 대체 제가 무엇을 잘못했나요, 제가 넘어져 다쳐야 속이 시원하실까요?… 눈물을 머금고 페달을 밟는다. 골목으로 숨어도 모퉁이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자동차나 배달 오토바이에 심장이 오그라든다. 이런 상황에서 헬멧을 쓰지 않는 것은 안전벨트 없이 고속으로 질주하는 자동차를 타는 것과 같다.

무엇보다 예측 못한 순간 일어난 사고에서 헬멧은 최소한의 보호막 역할을 한다. 지난해 여름 남산에서 당한 사고는 지금도 아찔하다. 험하기로 소문난 길이라 가볍게 뛰다시피 천천히 내려왔건만 ‘악’소리에 돌아 보니, 친구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지금도 사고 원인을 모른다. 도로를 샅샅이 훑었지만 돌 조각 비슷한 것도 찾지 못했다. 다행히 친구 머리에는 긁힌 자국조차 없었다. 쪼개진 헬멧만 교훈으로 남았을 뿐이다.

친구 황휘동(29)은 안 예쁘다고 웃었던 2만원짜리 빨간 헬멧. 사고 뒤 내부를 완전히 가로지르는 금이 갔다(붉은 원). 이제 그는 동네 슈퍼마켓에 갈 때도 헬멧을 챙겨 쓴다.
친구 황휘동(29)은 안 예쁘다고 웃었던 2만원짜리 빨간 헬멧. 사고 뒤 내부를 완전히 가로지르는 금이 갔다(붉은 원). 이제 그는 동네 슈퍼마켓에 갈 때도 헬멧을 챙겨 쓴다.

고백하건대 헬멧 없이 자전거를 탄 적이 없지는 않다. 본격적으로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지난 18개월 동안 못해도 대여섯 번은 아무 것도 쓰지 않고 거리로 나섰다. 찌는 여름 이마를 스치는 바람은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었고 자전거도로가 잘 조성된 동네 환경도 변명거리였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은 이제 막 자전거 문화가 움튼 곳. 도로 환경은 위험하다 못해 자전거에 적대적이다. 언젠가 네덜란드처럼 예쁜 머리 모양을 뽐내며 거리를 누빌 날이 올 수도 있겠지만, 오늘 헬멧을 쓰지 않을 이유는 없다.

★[1분 지식] 헬멧, 어느 정도 속도까지 부상을 막나?

전문가들은 주행 속도에 따른 헬멧의 부상 방지 효과를 딱 부러지게 수치로 설명하긴 어렵다고 한다. 사고 유형이 천차만별이기 때문. 느리게 달리다 넘어지더라도 머리가 돌부리에 부딪힌다면 크게 다칠 수 있다는 것(채영택 홍진HJC 책임연구원). 다만 시속 19.4km로 평면에 충돌시키는 시험을 통과한 헬멧만 정부가 공인한 안전인증(KC마크)을 받을 수 있다.

때문에 헬멧만 믿고 과속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은승표 코리아정형외과 원장은 “헬멧은 30km 정도까지만 머리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목뼈나 척추 부상까지 막는 것은 아니다”라며 “스키의 경우 머리를 다친 사람 중에 헬멧을 쓴 스키어가 더 많았다는 연구결과가 있었는데 자전거에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또 헬멧의 효과는 두개골 골절에선 상당하지만 뇌진탕(광범위한 손상)에선 크게 떨어진다고 한다.

‘과속은 금물’ 뻔한 이야기지만 한강만 나가도 무리 지어 시속 40km씩 달리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본다. 헬멧은 안전벨트처럼 기본적 안전장치일 뿐, 만능이 아니란 점을 기억하자.

김민호기자 kimon8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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