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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부살인' 벌인 사모님이 더 잘사는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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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부살인' 벌인 사모님이 더 잘사는 대한민국

입력
2016.03.0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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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 실린 고 하지혜씨 추모 광고. 하진영씨 페이스북
지하철에 실린 고 하지혜씨 추모 광고. 하진영씨 페이스북

64세 설모씨와 70세 윤모씨. 한 때는 두 여인 모두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대기업 임원 출신으로 탄탄한 사업체를 운영하던 남편과 아들, 딸 잘 키우며 살던 설씨가 부산 지역 중견 기업인 영남제분 회장의 사모님으로 거칠 것 없이 살아가던 윤씨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윤씨의 판사 사위 때문이었습니다. 윤씨가 중매인을 통해 맞아들인 판사 사위는 바로 설씨의 조카였습니다.

처음에 평범한 사돈이었던 두 여인의 인연은 14년 전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설씨의 딸이 윤씨의 사주로 납치돼 살해당하면서 악연으로 바뀌었습니다. 2002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여대생 공기총 청부살해 사건’입니다. (참고 삼아 살인범인 윤씨의 조카를 변호한 엄상익 변호사가 사건 전말을 소재로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소설을 소개합니다. 길지만 재미있습니다.)

한 명은 피해자의 유가족으로, 다른 한 명은 가해자로 14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우리가 어릴 적 배웠던 ‘권선징악’의 교훈을 비웃기라도 하듯 엇갈린 운명에 맞닥뜨립니다. 가해자는 수형 생활마저 특전을 누리고 있고 피해자는 지난달 20일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습니다.

감방 대신 병원에서 호화생활을 하던 영남제분 회장 윤길자씨 모습. SBS ‘그것이알고 싶다’ 영상 캡처
감방 대신 병원에서 호화생활을 하던 영남제분 회장 윤길자씨 모습. SBS ‘그것이알고 싶다’ 영상 캡처

피해자 두 번 울리는 ‘사법정의’

집 안 곳곳에 널브러진 빈 소주 페트병과 맥주캔들 사이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설씨는 165cm의 키에 몸무게가 불과 38㎏이었습니다. 부검 결과 위에서 내용물이 거의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안주 없이 술만 마셨다는 얘기입니다. 경찰은 설씨가 영양실조로 숨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설씨는 딸을 잃은 뒤 수 차례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곡기를 끊어 생을 저버렸습니다. 설씨의 몸과 마음을 앙상하게 만든 것은 과연 비참하게 딸을 잃은 슬픔뿐이었을까요?

숨진 지혜씨의 아버지 하모씨는 지난달 24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딸을 죽인 그들이 아내도 죽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감방에서 자숙하고 반성해야 할 사람이 호화병실에서 저녁 메뉴까지 지시해가며 희희낙락하는 모습이 피해자 입장에서 얼마나 가슴 아픈지 모른다”며 “반성은커녕 오히려 피해자를 비웃는 듯한 행태는 당해보지 않으면 그 비통함과 분노를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집사람의 죽음은 딸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마지막 몸짓이었고 그들에 대한 마지막 항변이었다”며 “사람을 죽여도 대수롭지 않은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쉽게 풀려나는 것을 보면 일반 시민들의 법 감정과 정말 거리가 멀다”고 꼬집었습니다.

중국과 베트남으로 도주했던 살해범을 잡은 사람도 생업을 접고 국내외를 뒤지고 다닌 하씨였습니다. 결국 피해자는 공권력과 사법당국의 도움을 받기는커녕 강자에게 너그러운 사법정의 앞에 더 큰 상처만 입고 말았습니다.

연세대 정문에서 1인 시위 중인 하씨의 오빠. 그는 '여대생 청부살인'을 벌인 윤길자의 주치의 박병우가 근무 중인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암센터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다 쫓겨났다. 하진영씨 페이스북
연세대 정문에서 1인 시위 중인 하씨의 오빠. 그는 '여대생 청부살인'을 벌인 윤길자의 주치의 박병우가 근무 중인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암센터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다 쫓겨났다. 하진영씨 페이스북

무기징역, 형집행정지, 그리고 모범수

2002년 세상을 충격에 빠뜨린 이 사건은 11년 지난 2013년 MBC ‘시사매거진 2580’과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다시 한번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살인교사 혐의로 2004년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윤모씨는 허위진단서를 발급받아 2007년부터 2013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형집행정지 결정을 받았고 총 15차례 연장했습니다. 돈과 권력이 결탁해 무기징역범이 10년의 수감생활 중 무려 6년 동안 집과 병원에서 버젓이 생활한 모습을 파헤친 것입니다. 이 보도가 없었다면 윤씨는 여전히 건강을 핑계로 탈옥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영위했을지도 모릅니다.

‘사모님의 수상한 외출’의 사회적 파장은 컸습니다. 검찰은 특혜성 형집행정지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고 법원은 2014년 2월 7일 회삿돈을 빼돌려 호화병실 요금을 지불한 당시 영남제분 류원기(68) 회장과 허위진단서를 발급해 준 주치의 박병우(55) 신촌 세브란스병원 교수에게 각각 징역 2년과 8개월의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이 때만 해도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는 줄 알았습니다. 재판부는 “윤씨의 사례는 일명 ‘가진 자의 합법적 탈옥’으로 전 국민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고 실형 선고 이유를 밝혔습니다.

하지만 모든 게 다시 뒤죽박죽이 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8개월 여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2014년 10월 30일 항소심 재판부는 원심을 깨고 류 회장에게 집행유예, 박 교수에게 벌금 500만원을 선고했습니다.

2013년 재수감된 윤씨는 최근 모범수로 선정돼 무기수인데도 출소를 앞둔 수형자들이 머무는 경기 화성 직업훈련교도소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직업 교육은 받지 않고 있습니다. 좋은 시설과 혜택만 누리고 있는 셈이지요. 형집행정지 특혜로 사회적 물의를 빚은 지 불과 2년 여 만에 모범수로 선정된 이유에 대해 법무부는 ‘내부 기준’만 내세우고 있습니다.

1심 재판부가 양형 이유로 밝혔던 ‘가진 자의 특혜에 대한 사회적 공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피해자 유가족들은 더 큰 절망에 빠져야만 했습니다.

숨진 하씨의 오빠는 지난달 29일부터 길거리로 나왔습니다. 서울고등법원(29일), 신촌 세브란스병원(3월 2일), 화성 직업훈련교도소(3일), 부산의 ㈜한탑(구 영남제분ㆍ4일 예정)에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여동생을 잃은 슬픔, 가족의 삶이 만신창이가 된 상실감을 짊어지고 있는 오빠의 어깨는 천근만근일 테지만 그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혼자만의 싸움이라는 외로움과 공허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1인 시위 계획을 밝히며 “억울함과 분노, 슬픔을 함께 해주세요. 마음으로도 충분합니다. 제 동생과 어머니만 잊지 말아주세요”라고 당부한 것을 보면 말이죠. 잊지 않고 지켜보고 응원만 해줘도 사법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난 2009년 서울 용산 4구역 철거민대책위원회 회원들이 농성 중인 한강대로변 재개발지역의 한 건물 옥상에서 경찰의 강제진압이 진행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 2009년 서울 용산 4구역 철거민대책위원회 회원들이 농성 중인 한강대로변 재개발지역의 한 건물 옥상에서 경찰의 강제진압이 진행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피해자 보듬을 ‘사회적 가슴’이 없다

비단 하씨 가족의 사례만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제대로 상처를 치유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2013년 발생한 태안 해병대 캠프 참사(관련 영상 : [잊으면 되풀이된다] 5명의 꽃다운 목숨, 누가 책임졌나 ? 태안해병대캠프 참사 2년, 뉴스타파)는 우리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5명의 무고한 학생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2014년 12월 이 사건의 재판은 마무리됐습니다.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아르바이트였던 보조교관이 가장 무거운 처벌을 받은 데 비해 정작 부실 관리의 원인을 제공한 원청업체 한영티앤와이 대표는 수상레저안전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받는 데 그쳤습니다. 하청업체인 K모 업체 대표는 기소되지 않았습니다.

사고 당시 희생된 이병학군의 아버지 이후식씨는 재판 진행 기간 중에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습니다.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리고 1년 만에 1인 시위를 포기했습니다. 이씨는 “책임을 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개탄했습니다.

2009년 1월 20일 발생한 ‘용산 참사’의 경우는 사건의 사후 처리가 피해자 유가족들을 보듬고 달래기는커녕 그들의 상처를 후벼 파는 꼴이 됐습니다. 당시 진압작전을 지휘했던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은 한국공항공사 사장을 거쳐 20대 총선 새누리당 예비후보로 등록해 국회 입성을 꿈꾸고 있습니다.

군 사망사고 피해자 유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김광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서 일했던 고상만씨는 올해 1월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에서 “유족들의 주장은 한결같이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이유라도 알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며 “하지만 국방부가 지급하는 위로금 500만원을 받기 위해 사망 신고 때 ‘사망의 종류’를 자살로 표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위로금을 받으려면 아들의 죽음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자살’로 인정하라는 얘기입니다. 국가가 피해자 유가족을 바라보는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014년에 발생해 아직까지 우리 사회 도처에 충격의 여운을 남기고 있는 세월호 참사의 경우 심리 치료가 진행되고 있지만 정작 그들이 치료받아야 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유가족의 심리 치료를 맡고 있는 김수진 안산온마음센터 부센터장은 지난해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가족분들이 정부에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것은 부모로서 해준 게 없다는 죗값을 스스로 씻기 위한 측면이 크다”며 “외부적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으니 유가족들이 내부의 문제를 들여다볼 틈이 없는 상황”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일일이 열거하려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한 해 발생하는 강력사건, 사고 피해자 유가족들을 정부에서 다 제 일처럼 챙기기에는 돈도 사람도 부족할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아픔을 보듬는 일의 시작이 공명정대한 진상규명과 그에 합당하게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임에 틀림 없을 것입니다.

청부살해로 여동생을 잃은 오빠 하씨는 말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법의 단죄를 받는 것은 당연한 거잖아요. 그것만이라도 제대로 이뤄진다면 고통스러운 피해자와 가족이 그나마 (아픔을) 잊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으련만…” 하씨의 말은 아마도 모든 사건 사고 피해자와 가족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김경준기자 ultrakj75@hankookilbo.com

태안 사설 해병대 캠프 사고 1주기를 맞은 2014년, 희생자들의 선배인 공주사대부고 56기 졸업생들이 청와대 입구에서 사건의 전면 재수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는 중, 참석한 유가족이 울음을 참지 못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태안 사설 해병대 캠프 사고 1주기를 맞은 2014년, 희생자들의 선배인 공주사대부고 56기 졸업생들이 청와대 입구에서 사건의 전면 재수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는 중, 참석한 유가족이 울음을 참지 못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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