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양진하 기자

등록 : 2018.03.08 04:40
수정 : 2018.03.08 09:34

[딥 DEEP 딥] ‘32년 문화게릴라’ 이윤택 신화, 예정된 파국

이윤택 연출가와 연희단거리패

등록 : 2018.03.08 04:40
수정 : 2018.03.08 09:34

이윤택 연극연출가가 지난달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30스튜디오에서 연극계 미투 운동으로 밝혀진 자신의 성폭행과 성추행등에 대해 사과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6년 부산서 10명으로 시작

‘오구’ 등 한국적 색채 뚜렷한 작품

연극 제작은 물론 극장 운영하고

축제 주관하는 등 전방위 단체

#월급 주며 연기만 전념하게 도움

이상적 연극 공동체… 70여명 합숙

이윤택 카리스마에 의존해 성장

강한 리더십이 결국 ‘양날의 칼’

‘문화게릴라.’ 이윤택(66) 연극연출가와 극단 연희단거리패가 등장할 때부터 따라 붙은 수식이다.문화 주변부 부산에 근거지를 둔 극단이고 2년제 방송통신대 졸업에 극단 경험이 일천한 이 연출가가 창단을 주도했으니 게릴라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주류질서를 뒤집어엎고 새로운 경향을 만들어내는 패기 어린 집단으로도 읽혔다. 비주류 감성을 지닌 만큼 개성과 정체성은 뚜렷했다.

이 연출가와 연희단거리패는 기성 연극계에선 찾기 힘든 도전의식을 연료 삼아 서울로 진격했다. 1986년 부산에서 출발한 연희단거리패는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강렬한 인상을 무대에 남기며 단숨에 연극계 ‘무서운 아이’가 됐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직후부터 ‘산씻김’ ‘시민K’ ‘오구-죽음의 형식’ 등을 연달아 히트시켰다. 굿과 판소리 등 전통기법을 현대극에 도입한 파격으로 호평 받았고, 온갖 연극상을 휩쓸었다. 이 연출가와 연희단거리패는 연극계 주류로 거듭났다. 이 연출가는 제도권 연극의 상징인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됐고, 연희단거리패는 국내 대표 극단 대우를 받았다. 지난달 말까지 이 연출가와 연희단거리패 앞에 시련은 있을지라도 실패는 없었다. 실험, 흥행 성공, 해외 진출, 파격 등 명예로운 단어가 지난 32년 시간 대부분을 채웠다. 하지만 지난달 ‘#미투(Me Too)’ 폭로 이후 이 연출가와 연희단거리패는 치욕의 이름이 됐다. 급작스러운 몰락이었으나 예정된 파국이었다. 이 연출가와 연희단거리패가 향유한 성공시대와 급추락은 한국 연극계의 민낯이다.

남달랐던 연희단거리패 색깔

연극계에서는 연희단거리패를 ‘독보적 존재감’을 지닌 극단이었다고 평가한다. 다른 극단과 우열관계를 떠나 극단 색깔이 워낙 뚜렷했기 때문이다. 작품 자체에 대해서는 좋고 싫음이 명확히 갈릴 수 있지만, 기존 연극에 안주하지 않는 연희단거리패 특유의 정신이 작품에 녹아 들었다는 평이 많다. 김명화 연극평론가는 “1989년부터 연희단거리패를 봤는데, 서울에 올라 온 부산 극단은 당시 굉장히 낯선 단체였다”며 “그럼에도 기존 연극계 흐름과 다른 강력한 에너지를 갖고 있었고, 강렬한 연극으로 연극계 주목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조형준 안산문화재단 지역문화부장은 “‘오구-죽음의 형식’과 같이 한국적 색채가 짙은 작품을 선보였고, 브레히트의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 등 한국식으로 번안한 외국 작품이 대중적으로 강한 흡입력을 지녔다”고 평했다.

연희단거리패는 작품뿐만 아니라 운영 방식 자체가 기존 극단과 달랐다. 연희단거리패는 연극인들 사이에서 ‘연극만 하며 살 수 있는 곳’으로 여겨졌다. 연극계에선 드물게도 연극배우들이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을 정도로 월급을 받았다. 막내 배우는 몇 년 동안 청소와 전단지 배포 등 잡무만 하는 다른 극단과 달랐다. 작은 역할이라도 맡으며 무대에 계속 오를 수 있었다. 연희단거리패가 지닌 ‘자산’ 덕분이었다. 연희단거리패는 서울 대학로에 한 때 게릴라극장을 운영했고, 얼마 전까지 30스튜디오에 공연을 올렸다. 부산에는 가마골소극장이, 밀양에는 밀양연극촌이 있었다. 2001년부터는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도 주관해왔다. 2009년에는 경남 김해시의 지원을 받아 밀양연극촌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도요창작스튜디오도 개관했다. 극단이 연중무휴로 공연을 하니 단원 대부분이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연기를 전공하지 않은 배우들에게 연희단거리패는 ‘기회의 땅’이었다.

신입단원 시절부터 연기할 기회가 주어지니 연기력을 다지기 용이했다. “연희단거리패 출신 배우가 아무래도 연기를 잘한다”는 인식이 연극계에 자리 잡았다. 영화배우 오달수, 곽도원, 윤제문, 연극배우 박지일, 남미정, 지현준 등이 연희단거리패 출신 배우다. 김소희, 오동식 등은 연희단거리패에서 죽 활동하며 연극계에서 이름난 배우가 됐다.

연희단거리패는 규모도 남다르다. 대학로에서 굵직하다 싶은 극단 단원이 50~60명 수준인데, 연희단거리패는 최근까지 단원수가 70여명에 달했다. 해외 무대에도 종종 공연을 올렸다. 1990년부터 해외공연을 시작한 연희단거리패는 일본과 독일, 러시아, 콜롬비아 등에 초청 받아 한국 연극을 세계에 알렸다.

그래픽=신동준 기자

이상적인 연극 공동체 꿈꿨으나…

연희단거리패는 합숙 생활을 하며 자신들의 색깔을 강화했다. 약 10명이 모인 창단 때부터 ‘그저 우리끼리 밥해 먹고 연극하며 사는 것이 꿈’인 극단이었다. 부산 거제동의 가마골소극장에서 시작해 서울로 올라온 연희단거리패는 1990년대 우리극연구소를 통해 젊은 연극인을 키워냈다. 1999년에는 경남 밀양시의 폐교 건물을 무상 임대 받아 밀양연극촌을 만들었고, 이곳은 연희단거리패의 터전이 됐다. 연희단거리패는 배우들이 연극의 기본기를 다지고 공동 생활을 하며 연극을 만드는 이상적 연극 공동체를 꿈꿨다. 연희단거리패는 연극 기획, 제작은 물론 극장을 운영하고 축제를 주관하는 전방위적 단체였다. 배우가 기획을, 연출이 배우를 맡기도 하고 무대 장치 등은 다 함께 작업했다.

연극공동체를 추구하며 공동 작업을 하다 보니 내부 결속력이 강했다. 연희단거리패는 “결속력에 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단체”로 여겨졌다. 극단 색깔이 강해 외부활동을 하는 배우들도 많지 않았다. 극단의 결속력은 열정적인 작업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었지만 극단 외부사람들에게는 “편하지 않은 극단”이라는 인상을 줬다. “자기들끼리 너무 바빠 스며들 틈이 없는 극단” “외부 사람은 자연스럽게 술 한잔 하기 어려운 극단”이었다. 이윤택 연출가의 성추행 등 성폭력이 외부로 터져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연극계 관계자들은 합숙 방식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김명화 평론가는 “팀워크, 앙상블 구축 등을 고민하다 보면 프리랜서들이 만나서 작업하는 것보다 극단 시스템을 갖는 게 더 좋고, 얼마나 오래 정기적으로 같이 공연을 하느냐에 따라 작품이 더 좋아질 수 있기 때문에 공동체성은 많은 극단의 꿈이다”며 “이런 공동체성을 지향하는 팀들이 외국에는 더 많다”고 했다. 일본의 연극연출가 스즈키 다다시는 주민이 400여명밖에 없는 곳에 ‘도가연극촌’을 만들어 40여년 간 운영해 왔다. 국내에서도 공연창작집단 뛰다 등이 폐교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며 연극을 창작한다. 숙식을 함께 하며 작품을 만드는 것 자체가 성폭력을 양산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양날의 칼 된 이윤택 리더십

다른 극단도 공동체 생활을 하며 연극 작업을 하는데, 유독 연희단거리패에서 성폭력이 오래도록 자행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연출가는 기가 센 연출가로 알려졌다. 자신의 작품이 강렬한 색채를 드러내 왔듯 자신의 에너지를 최대한 표출하고 발산한 연출가였다는 평가다. 이 연출가의 강력한 리더십이 있었기에 민간 극단인 연희단거리패가 자체 극장을 운영하고, 축제를 주관할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연극계 관계자 A씨는 “이 연출가가 훌륭한 작품을 만드는 일만 한 것이 아니고, 기획과 사람 고용까지 맡았다”며 “밀양과 서울 공연장의 순수 유지비만 매월 수천만 원이라고 들었는데, 단원들에게 월급까지 줬으니 개인이 해내기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강력한 리더십으로 극단을 쥐락펴락하던 이 연출가의 기질은 결국 양날의 칼이었다. 연극계 관계자 B씨는 “연희단거리패가 처음 서울에서 우리극연구소를 만들었을 때 연습실을 보고 ‘군대 훈련소 같다’는 말을 들었다. 연희단거리패는 다른 극단에 비해 예술감독 개인의 권력이 굉장히 크다고 알려져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윤택 연출가는 극작과 연출, 연기 훈련 등 무대 안팎을 모두 주도했다. 연극계에서는 연희단거리패가 ‘규율이 엄격한 곳’이라는 이야기가 들려 왔어도 폭력성이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는 말이 나온다. 공동체라는 폐쇄성 때문에 외부에서 극단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없었고, 강한 결속력이 내부 문제제기를 막는 구조였던 셈이다.

연희단거리패와 이 연출가는 한때 국내 연극계의 모범이었다. 극단 시스템이 사라져가는 연극계에서 공동체로서의 극단이 유효하다는 점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지리멸렬하던 연극계에 활력소 역할을 했기에 연극계의 실망과 충격도 더 컸다. ‘문화게릴라 신화’는 30년 만에 수면으로 드러난 극단 내 성폭력으로 막을 내렸다. 김명화 평론가는 “개인적으로 예술가와 예술작품을 별개로 봐야 한다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지만, 예술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성폭력이 용인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연희단거리패 출신’은 명예로운 수식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단원들에게 넘어야 할 높고 험한 산이 됐다. 이 연출가와 연희단거리패의 영욕은 국내 연극계에 짙고 긴 그림자를 남겼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딥 DEEP 딥’은 문화계 현상과 이슈를 깊게 들여봅니다. 매주 목요일 심도 있는 분석과 다채로운 시각이 담긴 문화계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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