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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이름 모를 환희가 출렁했다

입력
2016.05.23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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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대체 뭐했어요?" "해적에게 납치 안 당했어요?" 지인들의 물음에 이제야 답한다. 부산에서 멕시코까지 화물선을 탔다. 푸른 태평양을 가르는 16일간의 여정이었다. 무료할 거란 예상은 180도 뱃머리를 돌렸다. 의외로 다이내믹했다. 바다 보고 밥 먹고, 일기 쓰고, 어슬렁거리고... 기지개를 켜니, 멕시코에 닿았다. 거짓말처럼.

화물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객실에 있어도, 승객 모두 오늘 태평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다.
화물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객실에 있어도, 승객 모두 오늘 태평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다.
화물선 여행의 키워드 : 눈을 뜨고 감을 때마다 우린 바다가 된다!
화물선 여행의 키워드 : 눈을 뜨고 감을 때마다 우린 바다가 된다!

▦일단 한번 믿어봐, 여행자를 실은 화물선 브리핑

▦SPACE 1_객실 - 24시간 오션뷰 요람

연식이 오래된 듯한 빈티지 외관에 비해 객실의 첫인상은 말끔한 비즈니스 호텔.
연식이 오래된 듯한 빈티지 외관에 비해 객실의 첫인상은 말끔한 비즈니스 호텔.
객실은 건조방으로도 탈바꿈한다. 의자에 누가 앉아 있으면 왼편 욕실로 들어가 감금되는 수모는 겪어야 한다.
객실은 건조방으로도 탈바꿈한다. 의자에 누가 앉아 있으면 왼편 욕실로 들어가 감금되는 수모는 겪어야 한다.

화물선의 베이스캠프인 승객용 객실은 욕실을 포함해 약 6~7평의 원룸 형태로, 딱 5개뿐이다. 객실당 2인 이하이니 화물선에 수용 가능한 승객은 최대 10명인 셈. 이에 비해 선원은 30명 정도로 애초에 화물선은 승객보다 짐이 먼저임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우린 무엇보다 옴짝달싹 못하는 태평양 한가운데 떨어져 잉여의 최고 경지에 불시착했다. 스스로 노는 법에 도가 틀지니, 한국에서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일을 여기서 다 해치웠다. 지도를 펼치고 여정에 대한 계획을 대차게 세우고 여행지에 대한 공부까지 철저히. 잠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바다였다. 콧바람 쐬러 갑판으로 나가 흔들흔들 화물선의 미동에 맞춰 스텝을 밟았다. 이름 모를 환희가 출렁출렁했다.

▦SPACE 2_레스토랑 - 프랑스식 과식 정찬과 바다의 기별 한 장

끼니 때마다 평생 소진할 모든 지방을 축적해놓는 기분이 든다. 먹기 전부터 포만감이 느껴지는 애피타이저.
끼니 때마다 평생 소진할 모든 지방을 축적해놓는 기분이 든다. 먹기 전부터 포만감이 느껴지는 애피타이저.
양을 적게 달라는 주문에 나온 메인 디시. 아니면 이의 2배 되는 양과 싸워야 한다.
양을 적게 달라는 주문에 나온 메인 디시. 아니면 이의 2배 되는 양과 싸워야 한다.

화물선에서 하루는 군대를 연상하는 규칙으로 중심을 잡았다. 매일 일정한 시각에 끼니가 주어진다. 오전 7시에서 8시30분까지 아침, 오후 12시에서 1시까지 점심, 그리고 오후 7시부터 8시까지가 저녁 식사 시간이다. 프랑스 국적 배를 탄 덕에 뷔페식 아침을 제외하고 애피타이저부터 메인 디시, 치즈 및 디저트가 풀 코스로 서비스됐다. 늘 준비된 와인으로 알코올 중독이 되거나 검은 눈의 프랑스인이 되는 것이 진리. 문제는 양, 스모 선수가 먹을 수준이라는 것이다. 기내식처럼 영특한 칼로리 계산으로 나왔을 리 만무하며, 다이어트의 의지를 무너지게 하는 프랑스식 정찬이었다. 일하는 선원이 중심이기에 승객의 몸매 따위엔 1%의 관심도 없는 셰프의 충성심이여! 그럼에도 괴물처럼 ‘오늘 메뉴는 뭘까?’ 기대했다.

점심때면 식탁 위로 바다의 기별 한 장이 놓였다. 현재 선박의 위도와 경도, 바람의 속도 등을 기록한 궤도와 그날의 메뉴, 그리고 안전이나 구조 교육 등 공지사항이 담긴 A4 용지다. 특보가 있다면 오늘이 어제가 되어 뜬금없이 하루를 얻거나 오후 4시를 오후 5시로 바꾸라는 식의 시차 예고를 할 때. 하지만 무법의 시간 여행자가 되었을지라도 식사 시각은 무조건 동일했다. 이 한 장으로 총 6명 승객이 함께한 식탁의 주제가 잡힌다. 정독한 오늘의 메뉴를 공유하고 어제와 오늘의 다른 파도, 일출과 일몰, 바람 세기 등을 비교 평가하는 식이었다. 모두 본능에 상당히 가까이 있었다.

"당신은 오늘 태평양에서 1시간을 턱없이 잃었습니다"를 알리는, 테이블 위 알림장.
"당신은 오늘 태평양에서 1시간을 턱없이 잃었습니다"를 알리는, 테이블 위 알림장.
매일 이 바다의 기별 위로 그림을 그려 객실의 벽 장식에 신경 썼다. '나는 잉여다.'
매일 이 바다의 기별 위로 그림을 그려 객실의 벽 장식에 신경 썼다. '나는 잉여다.'

▦SPACE 3_편의시설 및 데크 - 미로를 뚫는 취객 산책

탕탕은 조종실에서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사정권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집요하게 체크하는 선원으로 빙의하곤 했다.
탕탕은 조종실에서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사정권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집요하게 체크하는 선원으로 빙의하곤 했다.
다른 승객과 함께 차를 마시거나 DVD를 즐기는 레크리에이션 룸. 각자 뭐하면서 보낼지 궁금하지 않은 유일한 시간.
다른 승객과 함께 차를 마시거나 DVD를 즐기는 레크리에이션 룸. 각자 뭐하면서 보낼지 궁금하지 않은 유일한 시간.
태평양 바닷물을 그대로 담은 수영장과 '핫'한 비키니 언니 달력이 있는 짐승들의 헬스장.
태평양 바닷물을 그대로 담은 수영장과 '핫'한 비키니 언니 달력이 있는 짐승들의 헬스장.
종종 길을 잃기에, 계단이나 엘리베이터 표식이 선내의 길잡이가 되곤 했다.
종종 길을 잃기에, 계단이나 엘리베이터 표식이 선내의 길잡이가 되곤 했다.

객실과 레스토랑에서의 용무를 제하면 대부분 시간은 화물선을 어슬렁거리는 데에 할애했다. 화물선은 건물로 따지면 총 9층으로 나뉜다. 내부에서의 상하 이동은 계단이든 엘리베이터든 끌리는 대로 택하면 될 일이나 외부 이동 시엔 '뺑뺑이'를 돌 작심을 해야 했다. 안전을 이유로 선원들이 부지런히 문을 잠그기 때문이다. 졸지에 태평양에 버려진 듯한 서러움 반, 두려움 반을 맛보았다.

화물선에 익숙해질수록 나름의 일과가 생겼다. 매일 아침 승객인 주제에 조종실에 올라 여러 네비게이터를 통해 현재 배의 동선과 상태를 체크했다. 달라 보이진 않으나 매일 다른 바다와 닮아갔다. 오늘은 화물선 말머리를 향해 흔들흔들 취객 산책을 하고, 내일은 헬스장의 러닝머신 위에서 태평양을 달리는 영예를 안았다. 키 작은 도서관을 기웃기웃하거나 위성 인터넷으로 바닷바람 실은(곧 느린) 메일을 보내거나 100% 해수탕에 다짜고짜 입수했다.

승객 모두가 숙련된 백수였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일이 되고, 사소한 것에 격하게 환희하는 방어 기제를 발동시키면서. 이상하리만치 매일 기록하고, 매 순간 감동한 나날이었다. 멕시코 만자니오에 도착하자 화물선 내에서 입국 절차가 진행됐다. 그 사이 한국을 서서히 떠나 보내고, 곧 만날 나라를 받아들였다. 오랜 시간 여행한다는 건 많은 견딤과 싸우는 일이다. 늘 화창하지만은 않은 게 여행이 아니던가. 그 견딤을, 화물선 여행으로부터 예습했다. 바다의 부름을 받은 해는 세상과 뜨거운 안녕을 하고, 밤의 별은 야속하게 빛났다.

이런 미로를 지나면서 하얗고 긴 수염을 단 파도를 감상하기도 했다.
이런 미로를 지나면서 하얗고 긴 수염을 단 파도를 감상하기도 했다.
비치 체어 대신 빈티지 갑판에 앉아 '알아서' 광합성을 하다가 팔에 화상을 입기 십상.
비치 체어 대신 빈티지 갑판에 앉아 '알아서' 광합성을 하다가 팔에 화상을 입기 십상.
멕시코에 도착하기 전날, 떼를 지어 유려하게 뛰어오른 미끄덩한 돌고래. 많은 사람의 우려와 달리, 해적에게 납치되는 톱뉴스는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았다.
멕시코에 도착하기 전날, 떼를 지어 유려하게 뛰어오른 미끄덩한 돌고래. 많은 사람의 우려와 달리, 해적에게 납치되는 톱뉴스는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았다.

강미승 여행 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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