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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바닥을 친 여행

입력
2017.10.18 15:01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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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치는 삶, 바닥을 나뒹구는 삶이 있는 곳. 나는 지금 인도 바라나시에 와 있다. 창조의 첫 새벽처럼 떠오르는 눈부신 태양을 보러 갠지스 강가로 가고 있다. 이 골목이 저 골목 같고 저 골목이 이 골목 같은 숱한 골목들을 빠져나가면 첫 배를 타고 나가 붉은 태양의 미소를 마주할 수 있으리라.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상가 모퉁이에 엎드려 잠든 소들. 일찍 깨어나 쓰레기더미를 뒤지며 먹이를 찾는 야성의 개와 염소들. 허름한 노천카페 문을 열고 짜이(인도 차)를 끓이는 상인들. 강가 계단에서 한뎃잠을 자고 부스스한 표정으로 일어나 명상 포즈로 앉아 있는 황색 가사 차림의 수행자들. 작은 물통 하나씩 달랑달랑 들고 신에게 바칠 성수(聖水)를 뜨러 가는 주민들. 그리고 관광객들의 두툼한 호주머니를 노리는 걸인과 불구의 아이들. 오늘 새벽 배를 타러 가며 마주친 풍경이다.

배를 타기 전 어린 소녀들이 파는 꽃등(燈)을 샀다. 소원을 빌라는 꽃등. 시동을 건 배가 강물을 밀고 나갈 때, 꽃등에 불을 붙여 강물 위로 띄웠다. 물결에 밀려 떠내려가는 꽃등이 시야에서 사라질 무렵 태양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떠올랐다. 강가 화장터에는 벌써 장작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랫도리만 가린 채 물로 뛰어들어 목욕재계하고 푸자(예배의식)를 드리는 사람들, 물통에 성수를 담아 강을 떠나는 이들의 모습도 보였다. 고대에 빛의 도시라는 뜻으로 ‘카시’라 불렸다는 바라나시 갠지스 강가의 풍경은 온갖 빛으로 으밀아밀 반짝거렸다. 성과 속, 삶과 죽음, 아름다움과 추함이 한 눈에 명멸하는 이곳. 동행한 일행 중엔 막 지나온 골목길을 떠올리며 더러운 도시라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으나 과연 잠깐 머무는 여행자가 그렇게 판단할 권리가 있을까. 이곳에 발을 딛고 사는 이들에겐 소중한 삶의 터전이요, 성스런 삶의 문화를 꽃피우는 자리가 아닌가.

몇 년 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인도의 종교와 문화를 활짝 꽃 피우는 데 이바지한 이곳 출신의 시인 카비르와 위대한 사상가인 라비 상카르의 유적지를 둘러본 적이 있다. 특히 카비르는 내가 매우 좋아하는 시인. 나는 문득 배 위에서 카비르의 시집을 펼쳐 일행들에게 시를 낭독해주었다. “내 형제여, 그렇게 자신감에 넘쳐/ 뽐내며 걷는 이유가 뭐지?/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간 거꾸로 있던 때를/ 잊었나?/ 몸을 화장하면 재로 바뀌고/ 땅에 묻으면 벌레의 먹이가 될 뿐./ 네 몸은 흙그릇에 담긴/ 물과 같다/ 네 명성은 얼마나 허망한가.// 꿀벌이 꿀을 모으듯,/ 살아서 재물을 모으나/ 죽은 후 살아남은 자들은 말한다./ ‘시체를 저리 치워!/ 왜 여태 치우지 않고 놔두는 거지?’”(신현림 편역, ‘사랑의 그네를 매달 시간’)

눈 밝은 시인은 ‘시체’ 운운하며 네 존재의 바닥을 보라고 말한다. 네 유한성을 보라는 것. 왜 이렇게 더럽고 비루하냐고 바닥을 치는 군상들을 보고 거들먹대는 이들도 있지만, ‘네 몸을 화장하면 재로 바뀌고/ 땅에 묻으면 벌레의 먹이가 될 뿐’인 네 존재의 실상을 보라는 것. 내가 이 도시를 좋아하는 것은 노력하지 않아도 내 존재의 바닥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카비르의 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가까운 화장터에서 풍겨오는 악취에 코를 틀어쥐며 충분히 바닥을 치는 경험을 했다. 물론 이런 경험은 우리를 힘들고 괴롭게 하지만 내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깊이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더라.

좀 더 가벼워지고 싶어 떠난 여행. 삶과 죽음의 실루엣이 교차하는 뱃놀이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배를 타고 떠날 때 울려오던 새벽 사원의 종소리의 여운이 살아나며 가슴 속에 메아리쳤다. 홀연히 떠나야 할 순간이 다가오면 홀가분히 떠날 수 있도록 그대의 삶을 가볍게 하라고.

고진하 목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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