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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파워블로거 스머프 할배의 ‘특별한 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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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파워블로거 스머프 할배의 ‘특별한 레시피’

입력
2016.12.01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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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징글맘을 위한 식사를 급히 차린 정성기씨. 밥상을 차린 뒤에도 앞에 앉아 요리가 입에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
지난달 30일 징글맘을 위한 식사를 급히 차린 정성기씨. 밥상을 차린 뒤에도 앞에 앉아 요리가 입에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

“오늘은 웬일로 늦게까지 주무시네요.” 말이 화근이다. 그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징글맘’(93)이 끄~응 기침하신다. 바로 배고프니 밥 달라 화내신다. 좁다란 거실 겸 부엌이지만 정성기(65)씨의 발걸음이, 손놀림이 빨라진다. 최대한 부드럽게 만든 즉석 계란찜, 간단한 수프 같은 몇 가지 요리가 잽싸게 차려진다. 징글맘의 성화가 보통 아니기 때문에 정씨는 자신만의 급속 조리법을 개발했다며 몇 가지 요령을 설명해줬다. 들을 땐 몹시 신기했는데, 애석하게도 요리에 젬병인 기자는 그만 잊어버렸다. 징글맘은 입맛에 맞으신지 잘 드신다. 급한 불을 끈 정씨가 다시 돌아와 앉았다.

지난 30일 경기 부천의 정씨 집을 찾았다. 정씨는 상 차리는 남자, ‘상남자’다. 햇수로 9년 동안 치매를 앓은 어머니에게 밥을 차려드린다. 그래서 이 경험을 묶어낸 책도 ‘나는 매일 엄마와 밥 먹는다’(헤이북스 발행)다.

2008년 어머니의 치매가 심해지면서 다니던 직장을 정리하고 부천에 단둘이 살기 시작했다. 변호사 동생이 집을 구해줬다. 징글맘에겐 대장암 증상도 있었다. 2009년 병원에선 길어봐야 6개월에서 1년이라 했다. 아버지를 3년간 요양원에 모시다 임종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악몽이 떠올랐다. ‘그래 1년이면 어떠랴’ 하는 마음에 직접 돌보기 시작했다.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병원에서는 “아들의 효심이 낳은 기적” “불가사의한 일”이랬지만, 흥겨운 것만은 아니다.

인생은 동그란 원이다. 갓 태어나 시도 때도 없이 먹고 자고 하던 아이는 자라면서 점점 이것저것 가리게 되지만, 이제 늘그막에 접어들어 치매까지 앓으면 하루하루 갈수록 점점 더 시도 때도 없이 먹고 자고 하는 때로 되돌아간다. 요즘은 하루에 12시간 이상을 주무시고 맑은 정신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갈수록 줄어든다. 정씨는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이다 보니 나 같은 경우는 가끔 지난 몇 년보다 최근 한 달이 더 지옥 같은 경우가 있다”며 웃었다. ‘징글맘’도 ‘이제 징글징글하다’는 의미가 있다. 가끔 농담 삼아 “이제 저 강을 건너 아버지 만나러 가시라”는 말도 한다. 요양원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다. 너무 힘에 부쳐 이도 빠지고 위궤양도 오고 했을 땐, 요양원에 보낼 수 있는 등급까지 받아뒀다. 그러나 ‘징글징글’이란 애증 아니던가. 차마 보낼 수는 없었다.

함경도 출신 징글맘도 보통은 아니다. 그 옛날 4년제 대학을 장학생으로 졸업했다. 팝송을 즐기고 맛과 멋과 모양새를 따지던 ‘모던 걸’이자 ‘신세대 여성’이었다. 그런 어머니다 보니 웬만한 요리로는 안 된다. 열심히 해다 바쳐도 좋은 소린 드물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니는 에미 덕에 서양 요리와 청요리에 일본 요리도 배웠으니 굶어 죽지는 않겠다. 그러니 에미에게 고맙다고 하거라.” 징글맘이 치는 큰소리다. 정씨는 그저 “이렇게 당당하시니 감사할 수 밖에” 웃을 뿐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날들이었다. 정씨는 “술 친구 많아서 늘 고주망태로 살았던 놈이 9년 동안 경조사 못 챙겨서 친구 다 끊기고 그렇게 살았다”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탈출구는 자전거와 블로그였다. 요양사가 오는 오전 3시간 동안 무조건 자전거를 탔다. 취미라기보다는 어머니를 모시려면 체력을 유지해야 해서다. 블로그 ‘스머프 할배의 만화방’ (http://blog.naver.com/adcsk)은 유일한 외부와 대화 창구다. 원래 책 얘기를 주로 썼으나 징글맘을 본격으로 모시고는 엄마를 위한 요리 레시피를 빼곡히 올렸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네이버 파워블로거에 뽑혔고, 지금까지 500여개의 레시피를 개발해 40여개는 독창성을 격찬 받기도 했다. 각지에서 응원이 쏟아졌다. 그의 사연을 읽은 이들은 자전거 탈 때 쓰라고 안경을 맞춰주기도 하고, 쌀이나 프라이팬 같은 것을 보내기도 한다. 정씨는 “100명 정도가 글이 늦어지면 걱정해주는 통에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요리하고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서로 위로와 격려를 하기도 한다. 정씨는 “가끔 부모님을 요양원에 모시려니 죄스럽다는 얘기를 전해오시는데 그러면 저는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나더러 어떡할래라고 물으면 나부터도 이렇게는 모시지 않겠다고 대답해준다”면서 “자기와의 단단한 약속을 지켜낼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차라리 요양원을 이용하고 자주자주 찾아 뵙는 게 훨씬 더 효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징글징글한 엄마지만 역설적으로 그를 버티게 해주는 것도 징글맘이다. “모든 자물쇠에는 열쇠가 있다는 게 똑 부러지는 성격의 어머니가 가진 지론이었거든요. 앞으로 상황이 어찌 될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또 어딘가에 열쇠가 있겠죠?”

부천=글ㆍ사진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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