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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박 대통령이 페미니즘을 알았더라면

입력
2016.12.1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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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가결된 9일 박근혜 대통령이 위민관에서 마지막 국무위원 간담회를 주재하며 모두발언을 마친 후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고영권 기자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가결된 9일 박근혜 대통령이 위민관에서 마지막 국무위원 간담회를 주재하며 모두발언을 마친 후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고영권 기자

정치적 사안과 별개로 ‘최순실게이트’는 내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었다. 청문회를 통해 드라마에서는 그렇게나 멋들어지던 재벌가 ‘실장님’의 실체를 볼 수 있었고, 청와대 의약품 반입 목록을 통해 그렇게나 다양한 주사제를 알게 됐다. 마침 송년회에서 만난 의사 선생님께 여쭸더니, 수면장애와 우울증 완화를 위한 향정신성의약품 등을 제외하면 영락없이 일주일에 두세 번 미용시술을 받는 ‘강남 마담’들의 처방전이란다.

‘강남 마담’은 중상류층 여성을 ‘된장녀’로 모는 불편한 표현이지만, 이와 별개로 “미국의 페미니스트 노년학자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수많은 한국 여성들의 쌍꺼풀 수술”이라는 한 책의 서문이 떠올랐다. 아마 80%의 한국 여성들이 성형이나 미용시술을 받지 않을까 싶다. 세계 어디서고 강남역 주변의 잔혹한 스펙터클 성형광고를 찾을 수 없고, 한국 부모들은 딸이 뛰어나기를 바라는 점 1순위로 거의 10년간 ‘신체(용모, 키, 몸매)’를 뽑았다. 심지어 목욕탕 한구석에서도 ‘쁘띠’ 성형이 행해진다. 성형 개조 방송은 “취직 못 해도 성형, 아파도 성형, 애인 없어도 성형, 자존감 낮아도 성형, 결론은 기승전성형”이라는 말을 재현한다. 그러니 박 대통령의 의약품 목록은 정도와 수준 차이만 있을 뿐 어지간한 한국인의 목록이 아닌가. 나 역시 소싯적 학교에서는 성형하는 페미니스트에 대해 치기 어린 논쟁을 하다가도 집에서는 성형수술을 한 친구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자취생들이 모여 살던 우리 집은 수술 사실을 집에 숨겼던 친구들이 은신하던 공간이었다. 당시 나는 혼자만 뒤처져 ‘못난이’로 남을까 불안해하던, 동시에 이런 ‘찌질함’에 좌절하던 20대 초반의 여자애였다.

이제 2주만 지나면 ‘한물갔다고’ 여겨지는 여자 나이 마흔이 된다. 조지 클루니, 리차드 기어, 손석희처럼 중년 이후의 멋진 인간은 죄다 남자들만 보이고, 섹시하게 나이 드는 것을 일컫는 ‘중후하다’란 말도 남성 전용이다. 중후한 김혜자 언니, 이상하지 않은가. 젊든 늙든 여자에게는 예쁘거나 섹시하거나 아름답다가 붙는다. 심지어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마저도 올림머리 하듯 주름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보며 이러려고 여자가 됐나 하는 자괴감마저 든다. 그럼에도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서른 중반 이후 ‘어린 여자’에서 벗어나 비로소 남들에게 어여쁘게 보이지 않아도 스스로를 어여삐 여길 수 있는 시간이 온다고 말이다. 성형수술을 했냐 안 했냐는 그리 중요치 않다. 존 버거의 소설 대사처럼 결국 “인생이라는 건 본질적으로 선을 긋는 문제이고,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지는 각자가 정해야” 하니까. 미친 듯이 몸 개조를 권하는 사회에서 중독이 되지 않게 적절히 선을 긋고, 조금씩 내 몸과 싸우지 않고 화해하며, 중후하게 나이 들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그리고 내 곁에는 페미니즘이 있었기에 “아름다움이란 신체적 특징만큼이나 스스로를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레베카 솔닛의 말을 체화할 수 있었다. 도브(Dove)의 리얼뷰티(real beauty) 캠페인에 나온, 가슴이 작고 흰머리가 성성하고 주름이 자글거리고 검버섯이 다닥다닥 나고 머리가 아주 짧고 꽤 통통한 그녀들의 다양한 모습이 좋아 보인다. 풀 메이크업 한 서양 미녀가 그려진 마른 인형의 얼굴을 지우고 자기 얼굴이나 원하는 얼굴을 직접 그려 넣는 교육도 있고, 외모 다양성을 지향하는 ‘다다름네트워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별도의 피부관리는 안 하고 마음이 예쁘면 예뻐진다”는 박 대통령의 ‘구라’에는 코웃음을 쳤지만, 이런 움직임과 사람들 덕에 성형수술, 보톡스, 필러 따위 없어도 팔십에 자전거를 타는 멋진 할머니가 될 것 같은 예감이 솟는다. 이런, 박 대통령도 진작에 페미니즘을 접해야 했건만.

고금숙 여성환경연대 환경건강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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