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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베네수엘라의 위대한 시간

입력
2017.06.11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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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눈물 어린 동화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58위, FIFA 월드컵 본선에 한번도 오른 적 없는 나라, 20세 이하 월드컵(U-20) 본선에 겨우 두번째 출전한 베네수엘라. FIFA 주관 국제대회를 통틀어 사상 처음 결승에 오른 이 축구 약소국의, 세계를 놀라게 한 성과다. 비록 결승전 한 게임을 내주었지만, 2017 U-20 월드컵은 베네수엘라의 위대한 시간이었다.

남미지역예선 3위로 U-20 본선에 턱걸이한 베네수엘라를 눈 여겨 본 이들은 없었다. 그러나 이 팀은 패배라는 단어를 모르는 듯했다. 조별리그에서 독일(2-0), 비누아트(7-0), 멕시코(1-0)를 차례로 격파, 조 1위로 16강에 올랐고 이후 일본(1-0), 미국(2-1)을 연장 접전 끝에 물리쳤다. 승부차기에서 신들린 골키퍼 쇼로 포르투갈을 누르고 4강에 오른 우루과이마저 베네수엘라와의 승부차기에선 제물이 되었을 뿐이다(1-1무, 승부차기 4-3).

베네수엘라 U-20 대표팀은 대부분 관심도, 봉급도 많지 않은 자국 리그 선수들이다. 라파엘 두다멜 베네수엘라 감독이 도대체 이 경험 없는 어린 선수들에게 무슨 주문을 걸었단 말인가. 그의 인터뷰를 보면 이 팀이 무엇을 위해 숨차게 달리고 부딪치고 넘어지는지 짐작할 수 있다. 8일 우루과이와의 승부차기를 눈물범벅으로 지켜본 두다멜 감독은 말했다. “오늘의 17세 소년은 행복으로 가득 찼지만, 어제의 17세 소년은 목숨을 잃었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이제 그만 무기를 내려놓아야 할 때다.”

베네수엘라의 현실은 처참하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따르면 지난해 물가는 800% 상승했고 생필품과 의약품이 없어 출산 여성 사망률이 65%나 치솟았으며 살인범죄는 2만8,479건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독재정권의 오랜 무능과 부패가 유가 하락과 결부돼 나라를 거덜냈다. 4월 1일 대법원이 야당이 장악한 의회의 권한을 대행하겠다는 판결을 내리면서 대대적 반정부 시위가 시작됐다. 이후 석달 째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병원에도 최루탄을 쏘는 무지막지한 무력을 동원했고, 67명이 사망했다. 두다멜 감독이 언급한 것은 시위 중 부상으로 숨진 17세 소년 네오마르 란데르였다.

두다멜 감독의 마법은 암울한 조국에 희망이 되겠다는 일념, 이를 위한 투지와 열정을 불어넣은 것일 터다. 11명의 선수가 상대 골을 향해 달려 공을 차 넣는 이 단순한 경기는 결속과 조직화, 전투의 본성을 가장 원형에 가깝게 재현한다. 그래서 축구는 때로 나라를 하나로 뭉치게 하고 국가간 전쟁을 대리한다. 때로는 그저 이기겠다는 열정과 투지만으로 벅찬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골프 여제 박세리가 한국을 외환위기(IMF)에서 구하진 않았으되 쪼그라든 한국인의 마음을 위로했던 것처럼, 2002년 월드컵 대표팀이 한국을 선진국으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은 것처럼.

2002년 월드컵 신화의 주인공은 대한민국이었다.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칼럼에서 “정직과 열정, 그리고 순수한 선의”의 경기를 하는, “축구란 도덕적 용기에 관한 것이라고 믿는” 한국이 우승할 자격이 있으며 축구라는 세계의 상속자라고 상찬했다. 15년 만에 한국에서 열린 FIFA 대회에서 그 자리는 마땅히 베네수엘라의 몫이다. 베네수엘라는 헌신과 절실함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강팀을 맞아 주눅들지 않았다. 포기하지도 않았다. 추가시간 동점골을 넣었고, 승부차기에서 이겼다. 그래서 위대한 시간이었다.

두다멜 감독은 “거리로 나선 아이들, 지금 월드컵에 출전 중인 우리 선수들이 한결같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더 나은 베네수엘라뿐”이라고 말했다. 이제 그의 바람이 실현되기를 바란다. 축구장에서의 저 아름다운 기적이 베네수엘라에서 이루어지길.

김희원 기획취재부장 h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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