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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결정한 중동 파견 엄마가 전화해 "못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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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결정한 중동 파견 엄마가 전화해 "못 보낸다"

입력
2014.08.0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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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준비부터 사표까지… 회식·야근 때도 "열외시켜 달라"

부모 그늘 왜 못 벗어나나 "스스로 부끄러운 줄 알게 해야"

키덜트가 어렸을 적 향수를 계속 간직하고 싶은 어른이라면, 찰러리맨은 몸만 자란 어른이다. 찰러리맨은 어린이란 뜻의 차일드(child)와 직장인을 의미하는 샐러리맨(salaryman)의 합성어다. 즉 입사 후에도 회사나 개인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의존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회사에서 어떤 결정을 하면 당사자들은 의사 표현을 하지 않고 대신 부모들이 나선다. 모 업체 관계자는 “회사의 결정에 대해 당사자는 별 불만을 표시하지 않는데, 부모에게서 전화가 걸려오니 답답한 노릇”이라며 “문제는 당사자들이 부모가 나서는 것에 대해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과연 그런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의외로 많은 기업들이 찰러리맨 때문에 속앓이를 하고 있다.

“우리 애가 더 좋은 곳으로 옮겼어요”

찰러리맨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곳은 취업 현장이다. 매년 대기업들이 신입 사원을 뽑는 시기만 되면 인사 담당자들의 전화가 불이 난다. 대부분 지원 대상자들의 부모들이다. “우리 아이가 지원하려고 하는데 무엇을 준비해야 하느냐”“어떤 점을 중점적으로 준비해야 하느냐”“합격자 토익 평균이 몇 점이냐” 등등 채용 관련 문의가 빗발친다. 대기업 A사 인사팀 관계자는 “취업 시즌만 되면 부모들의 전화가 많이 걸려 온다”며 “회사의 채용 기준은 공개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응대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합격자 발표를 하고 나면 이번에는 불합격자들의 부모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다. “떨어진 이유가 무엇인가” “다음에 붙으려면 무엇을 보완해야 하는가”등등 질문도 다양하다. 대기업 B사 관계자는 “마치 입시학원 상담하듯이 조목조목 물어온다”며 혀를 내둘렀다.

합격자들도 다르지 않다. 신입사원 교육을 위해 연수원에서 합숙 등을 진행하면 어김없이 회사로 부모들의 전화가 걸려 온다. 알려준 내용 외에 더 준비해야 할 것은 없는지, 연수원 실내 온도는 어떤지 등 근심 어린 질문들이 이어진다. 대기업 C사 관계자는 “연수원 반찬을 물어보기도 한다”며 “자식 걱정하는 부모들의 마음이 헤아려지면서도 쓴웃음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털어 놓았다.

문제는 찰러리맨 현상이 부모의 단순한 근심 걱정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적 영역인 회사 업무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기업들의 고민은 여기에 있다.

모 제조업체 영업팀장은 지난해 어느 날 밤늦게 걸려온 전화를 잊지 못한다. 중동 파견이 결정된 신입사원의 어머니였다. “팀장의 생일선물까지 챙겨줬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보내지 않으면 안되느냐, 정 보내야겠다면 회사를 그만두도록 하겠다”는 엄포였다. 그는 “고맙게 받은 생일선물에 그런 뜻이 있는 줄 몰랐다”며 “할 말이 없었다”고 술회했다.

모 게임업체 개발팀 직원들은 ‘같아요맨’이라는 별명을 가진 개발자를 떠올렸다. 개발팀 특성상 야근이 잦고 회식도 많았는데, 야근이나 회식을 하면 해당 직원의 부모로부터 팀 전체에 “먹고 힘내라”는 쪽지와 함께 간식이 배달됐다. 처음에는 반겼던 동료들도 시간이 지나자 쪽지의 무서움을 깨닫게 됐다. 팀장이 업무에 대해 지적을 하면 “이해해 달라”, 회식을 예고하면 “열외시켜 달라”등의 요지가 적힌 쪽지가 전달 됐다.

부모의 관심이 높아질수록 해당 직원은 자신감이 떨어졌다. 업무 관련 의견을 물으면 “좋은 것 같아요”란 말만 되풀이했다. 결국 그 직원은 스스로 회사를 떠났다.

모 유통관련 대기업은 신입 사원을 뽑으면 매장에서 현장 근무를 시킨다. 9개월 간 잘 나오던 신입 사원이 내리 사흘간 무단 결근을 했다. 해당 직원은 도통 연락이 되지 않더니 나흘째 어머니가 사표를 대신 들고 나타났다. “우리 아이가 더 좋은 곳으로 옮겼어요.”업체 관계자는 “아무리 회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절차가 있는데, 부모가 대신 사표를 들고 와 너무 황당했다”고 말했다.

386세대의 구조적 문제와 퇴행 현상의 산물

그렇다면 찰러리맨 현상들은 왜 일어날까. 하지현 건국대 의대 신경정신과 교수는 두 가지를 짚었다. 사회 구조적 문제와 퇴행현상이다.

하 교수는 “386세대 부모들이 처음으로 자녀들을 사회에 내보내고 있다”며 “그런데 386세대 부모들이 자신들이 자라온 방식 그대로 자식들의 사회 진출을 거들고 있다”고 말했다. 본인이 부모들의 관리 하에 오로지 공부만 해서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다 보니 이를 자녀들에게도 되풀이 한다는 것이다.

자녀가 성인이 된 후에도 결혼, 직장 문제까지 부모가 관리하려 든다. 자녀들 또한 자연스럽게 여기 순응한다. 부모가 하라는 대로 해서 대학에 합격하고 취직까지 하면 이후에도 더욱 부모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하 교수의 지적이다.

여기에 경제적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하 교수는 “주체적 의사결정을 하려면 부모로부터 심리적 독립을 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경제적 독립이 선행돼야 한다”며 “경제적 독립할 능력이 떨어지니 심리적 독립도 이뤄지지 않는다”고 짚었다. 그렇다 보면 사회 진출해서도 자신의 판단보다는 부모의 그늘 아래서 부모의 뜻을 따르려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관점은 심한 경쟁 사회가 불러 일으키는 퇴행이라는 해석이다. 하 교수는 “심한 경쟁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극복하기 보다 뒤로 물러나 기피하려 든다”며 “나이든 어른들이 동창회에서 어렸을 때 별명을 부르며 아이들처럼 노는 것도 그런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찰러리맨은 학력 위주의 극심한 경쟁을 요구하는 우리 사회가 낳은 현상이다.

부끄러움을 알게 하라

해결 방법은 무엇일까. 하 교수는 기업이든 가정이든 당사자가 “부모에 의존하는 일이 창피한 것이라는 점을 일깨울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또 “기업체 인사담당자들도 반듯한 중산층 이상의 좋은 집안, 좋은 학력 출신들을 뽑기 보다는 지방대 출신 등 힘들게 자란 사람들을 뽑는 게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기업들은 어떤 노력을 할까. 삼성의 경우 계열사별로 심리 상담실을 운영한다. 즉, 업무 스트레스나 개인적 고민거리 등이 있으면 언제든 심리 상담실을 찾아 전문 심리상담사의 상담을 받는다. 모 대기업은 얼마 전 계열사 인사담당자들이 모여 찰러리맨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고, 신입 교육 이후에도 주기적 재교육 등을 실시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하 교수는 “찰러리맨 현상은 사회가 바로 잡을 수 없다”며 “당사자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게 필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나타나는 사회구조적 문제인 만큼 문화적인 부분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최연진기자 wolfpack@hk.co.kr 김명선 인턴기자(고려대 철학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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