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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기본소득, 소비할 권리와 일할 권리 사이

입력
2016.05.18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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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다. 영국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는 “대안은 없다”라는 슬로건을 즐겨 사용했다. 대처는 복지국가가 망쳐놓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 세금, 임금, 복지지출을 낮추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고 강변했다. 신자유주의로 알려진 이 흐름은 1980년대 이후 세계를 지배했다. 그 어떤 국가도 신자유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아니 한국은 본래부터 예외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1948년 정부 수립 이래 세금, 임금, 복지는 줄곧 낮았고, 국가정책은 재벌을 위한 것이었다. 변한 것이 있다면 민주화 이후 재벌 위에 군림하던 국가가 재벌 아래로 내려간 것뿐이다. 좋은 것은 항상 재벌의 몫이었고, 국가는 국민에게 재벌이 세계시장에서 성공할 때까지 허리띠를 졸라매며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그나마 1990년대 초까지는 재벌이 남겨주던 떡고물을 얻어먹을 수 있었지만,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더 이상의 떡고물은 없었다. 재벌이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좋은 일자리는 줄어들고, 빈곤과 불평등은 증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떡고물에 대한 국민의 집착은 집요했다. 최근 두 차례 혹독한 경제위기를 겪었지만, 국민은 살림살이가 나아지기 위해서는 재벌이 주도하는 수출 중심의 성장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감세를 통한 일자리 창출과 증세 없는 복지확대 공약에 현혹되어 8년을 더 보냈지만 경제도, 일자리도, 살림살이도 나아지지 않았다. 우리를 기다리는 있던 것은 최고의 청년실업률, 전월세대란, OECD 최장의 노동시간과 최고의 자살률, 부의 대물림, 젠더, 지역, 계층 간 불평등이었다. 그야말로 희망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헬조선’이었다.

대안은 없는 것일까? 기본소득이 이야기되고 있다. 좋은 일자리가 감소하는 사회에서 고용과 무관하게 모두에게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매력적이다. 멀지 않는 장래에 인공지능이 일자리의 상당 부분을 대신한다고 하니 기본소득은 고용이 감소하는 사회에서 복지국가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중도 우파가 집권한 핀란드에서 모든 국민에게 월 550유로(약 73만원)를 지급하는 기본소득제도를 시범적으로 실시한다고 하니 기본소득을 몽상이라고 치부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복지국가는 단순히 현금을 제공하는 국가가 아니다. 복지국가는 적극적으로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국가이고, 이를 통해 삶의 의미와 존엄성을 보장하는 국가이다. 북유럽 복지국가의 높은 공공부문 고용률은 복지국가의 이런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실제로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취업자 10명 중 3.5명이 (준)공무원이다. 어쩌면 문제는 일자리가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좋은 일자리를 만들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단순한 비교이지만 만약 우리가 OECD 평균수준으로 공공부문의 취업률을 높인다면 최소한 수백만 개의 새로운 공적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 덴마크는 한 명의 장애인을 돌보기 위해 여러 개의 공적 일자리를 만든다고 한다. 왜 그들은 하고 우리는 못 하는 것일까?

좋은 일자리의 감소는 천재지변이 아니다. 무급 또는 값싼 일로 간주하는 돌봄과 같은 공익적 활동을 새롭게 공적인 일로 정의하고, 그에 걸맞은 급여를 제공해야 한다. 물론 기본소득과 같은 새로운 시도도 필요하다. 하지만 새로운 시도가 시대의 필요를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한다면 그 시도는 유토피아를 향하는 디딤돌이 아니라 디스토피아를 향해 내려가는 계단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일하는 동물이고, 일을 통해 스스로의 존엄과 사회적 존재가치를 확인하기 때문이다. 이분법적 선택이 아닌 새것과 옛것을 조화시키는 지혜가 필요하다. 기본소득과 일도 다르지 않다. 소비하지 않는 인간을 상상하기 어려운 것처럼 일하지 않는 인간도 상상하기 어렵다. 대안은 있다. 우리가 실행하지 않을 뿐이다.

윤홍식 인하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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