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수능 잘 본들 삶 달라질까… 수험생들 ‘순실 무력증’

알림

수능 잘 본들 삶 달라질까… 수험생들 ‘순실 무력증’

입력
2016.11.09 17:14
0 0

정유라 입학ㆍ학사 특혜에 박탈감

“학교에서 배운 정의 다 무너져

금수저로 태어났으면…” 생각도

스트레스 탓 심리상담도 급증

시국선언 동참ㆍ거리집회 참여

상실감 털어내려 안간힘도

“열심히 공부해서 수능 점수 좀 잘 받는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요.”

대학수학능력시험(17일)을 일주일 앞둔 고교 3학년 이모(18)양은 지난달 중순부터 1시간 이상 공부에 집중한 적이 없다. 이화여대를 비롯해 원서를 냈던 대입 1차 수시모집에서 줄줄이 고배를 마셔 가뜩이나 심란한 터에 정권 비선실세인 최순실씨 딸 정유라씨의 입학ㆍ학사 특혜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자 박탈감을 이겨내기 힘든 것이다. 이양은 9일 “지금까지 학교에서 배운 정의의 기준으로는 상상조차 안 되는 일이 버젓이 자행됐다”며 “설령 시험을 잘 보고 원하는 대학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들만의 리그’가 지배하는 이 나라에서 버텨낼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털어놨다.

‘최순실 게이트’가 정국을 집어 삼키면서 수능 시험을 코 앞에 둔 수험생들이 자괴감과 무력감에 빠져있다. 노력, 성실이 삶의 우선 가치가 돼야 한다는 그간의 배움이 송두리째 무너진 탓이다. 컨디션 조절이 가장 중요한 시기에 마음을 다잡지 못하는 자녀, 제자들을 바라보는 학부모와 교사들의 속도 타 들어 가고 있다.

수험생 구모(18)양은 지난주 서울의 한 정신상담센터에서 상담을 받았다. 구양은 2년 가까이 잠자는 6시간을 제외하고 공부에 매달렸다. 하지만 여름부터 모의고사 성적이 계속 떨어져 고민하던 차에 정유라 사태가 터지자 하루 종일 뉴스만 챙겨보면서 불공정한 사회에 분노가 깊어졌다. 그는 “슬럼프가 최씨 모녀 탓은 아니지만 부모 잘 만난 덕에 모든 것을 이룬 정유라를 보며 ‘금수저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걸’ 하는 몹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며 한숨을 쉬었다.

구양처럼 심리클리닉이나 청소년 단체를 찾아 정신적 충격을 토로하는 수험생들은 적지 않다. 서울 송파구의 한 정신과 전문의는 “원래 수능이 임박하면 병원을 찾는 수험생이 많은데 올해는 20% 정도 더 늘었다”며 “부정적인 사회이슈가 끊이질 않으면서 이른바 ‘순실증’으로 인한 스트레스 지수가 급격히 높아진 것 같다”고 설명했다.

수험생들의 고민은 온라인 커뮤니티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도 쏟아지고 있다. ‘돈이 없으면 사회 초년생 때부터 희망을 걸만한 기회조차 없을 것’이라는 예ㆍ체능 수험생들의 토로부터 ‘장래희망을 포기하게 됐다’는 이야기까지 각자 생각을 담은 글이 하루 수십개씩 올라 온다. 수능 관련 페이스북 계정 역시 관련 뉴스 화면 사진에 ‘#공부하기싫다’는 해시태그(#)를 단 댓글이 여럿이다. 학생단체 ‘중고생연대’ 최준호(19) 상임고문은 “지난달 중순 이후 매일 20건 이상의 전화ㆍSNS 상담이 접수되고 있다”며 “‘우리가 어른이 돼 좋은 세상을 만들자’며 서로를 위로하지만 사실 회의감을 쉽게 떨쳐 내기 어렵다”고 전했다. 경기 평택의 한 고교 교사도 “항상 정의롭게 살라고 가르쳤는데 이번 국정농락 사태는 논리로 설명조차 어려워 상담을 해도 아이들 마음을 달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물론 다양한 방법으로 상실감을 털어 내려는 움직임도 있다. 일부 수험생들은 시국선언에 동참하고 직접 거리로 나서 정권 퇴진 목소리에 힘을 보태기도 한다. 지난 2일 한 입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민주사회에서는 정책 의제가 민간에 의해 제기되는 외부주도 모형이 주로 나타난다고 배웠다(수능특강 독서 사회). 그러나 우리의 지도자를 통제해왔던 것은 민간과 법이 아닌 한낱 개인이었다”며 수능 문제를 차용한 한 수험생의 시국선언문이 게재돼 화제를 모았다. 지난 5일 서울 광화문광장 집회에 참석한 금모(18)군은 “친구들과 SNS 대화방을 만들어 현 시국을 놓고 토론을 하고 있다”며 “청소년의 시각으로 사태의 본질을 탐색하다 보니 언젠가 ‘우리가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무력감이 극에 달한 상황이지만 젊은 세대가 잘 극복할 경우 사회변화의 동력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긍정적 분석도 나온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책에서나 볼 법한 사회 부조리가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목도한 청소년들의 충격은 상상 이상일 것”이라며 “이들의 좌절감과 분노가 각종 문제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논의의 뿌리가 될 수 있도록 해법의 방향을 제대로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