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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들 AI 시름 “금란 때문에 거래처 다 잃을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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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들 AI 시름 “금란 때문에 거래처 다 잃을 판”

입력
2017.01.0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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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있어도 못 사는 ‘계란 대란’

공판장 업체 찾아 무작정 애원도

생닭 유통금지 시장엔 빈 철장만

피해농가는 정부 보상 받지만

유통 상인들은 손실 고스란히

“늑장대응 탓 애꿎은 서민만 눈물”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 여파로 계란값 폭등세가 이어지고 있는 1일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 계란 코너에 계란 1인 1판 구매 안내문이 붙어있다. 연합뉴스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 여파로 계란값 폭등세가 이어지고 있는 1일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 계란 코너에 계란 1인 1판 구매 안내문이 붙어있다. 연합뉴스

“식당을 해서 계란이 꼭 필요해요. 저렇게 쌓여 있는데….”

지난달 27일 서울 송파구 가락시장 농수산물센터 내 한 계란 도매업체. 60대 여성 손님의 말에 사장 심모(44)씨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납품업체 공급 물량만 겨우 막고 있다”는 심씨의 설명에도 손님이 계속 애원하자 그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계란 한 판을 내밀었다. 심씨는 “하루에 계란 4,000판은 너끈히 팔았는데 지금은 1,000판도 확보하기 힘들어 거래처 계약이 다 끊길 상황”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정유년(丁酉年) ‘닭의 해’가 밝았지만 정작 “닭 때문에 못살겠다”는 아우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사상 최악의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어서다. 전국에선 닭 울음소리가 멈춘 지 오래고 계란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금란(金卵)’이 됐다.

수도권에서 유일하게 산 닭을 잡아 판매해 온 성남 모란시장에도 상인들의 푸념만 가득했다. 성남은 AI 발병지역이 아니지만 확산 우려로 11월 중순부터 살아있는 가금류 유통이 금지됐다. 손님들이 고른 닭을 잡아 주던 풍경은 사라지고 빈 철장만 남았다. 인근 A건강원 주인 윤모(52)씨는 “매일 닭 70~80마리를 판 가게가 맞나 싶을 정도로 요즘 주문이 아예 없다”며 “2014년 AI 사태 때 진 빚 5,000여만원도 아직 못 메웠는데 또 이런 일이 터져 답답하다"고 말했다. 김용복 모란가축시장상인회장은 “시장 전체의 매출이 사실상 ‘0’인 상태”라며 “가겟세나 인건비는 그대로인데 대책은 전무하니 전염병 파동이 진정되기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고 토로했다.

반면 대대적인 닭 살처분으로 귀한 몸이 된 계란 값은 고공행진 중이다. 계란 대란이 가시화하면서 도ㆍ소매상과 자영업자들은 생계마저 위협 받고 있다. 1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한달 전 한 판(30알)에 5,603원이던 계란 가격은 이날 8,237원까지 치솟았다.

여느 때 같으면 문을 활짝 열어두고 손님을 맞았을 서울 잠실 계란공판장 업체들은 아예 내부가 보이지 않게 신문지를 덕지덕지 붙여뒀다. 상인 박전규(68)씨는 “아무리 판매 물량이 없다고 해도 고객들이 찾아와 무작정 기다리는 통에 출입을 막았다”고 말했다. 강종성 한국계란유통협회 회장은 “AI 피해 농가는 정부가 보상이라도 해주지만 유통 상인들은 금전적 손실을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다”며 “문을 닫는 도ㆍ소매업체가 하루 수십 군데씩 속출하고 협회 탈퇴 행렬도 줄을 잇고 있다”고 설명했다.

계란을 취급하는 영세 자영업자들도 직격탄을 맞았다. 몇 달 전 서울 서대문구에 최근 유행하는 카스텔라상점을 연 조모(42ㆍ여)씨는 폐업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10조각이 나오는 카스텔라 한 판을 구우려면 계란 58개가 필요한데 도저히 수요를 맞출 수 없는 탓이다. 조씨는 “값을 2, 3배 쳐준다고 해도 계란 자체를 팔지 않아 이대로는 열흘도 버티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일부 학교와 식당에서는 계란을 재료로 한 음식을 메뉴 판에서 제외하는 등 비상조치에 나섰고, ‘조달 어려움으로 란류 메뉴 제공이 어렵다’는 안내문을 내건 대학들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계란 수급 불균형과 가격 폭등에 따른 불만은 정부로 향하고 있다. 서울 한 대형마트에서 한 판에 1만원 가까이 오른 계란을 보고 발걸음을 돌린 주부 강혜선(48)씨는 “이달 말 설까지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제사상에 올릴 전도 부치지 못할 것”이라며 “정부의 늑장대응과 헛발질이 겹치면서 애꿎은 서민들만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모인필 충북대 수의학과 교수는 “정부는 AI 사태 원인을 철새 탓으로 돌려 방역 초동 조치에 실패한데다 이후 부처끼리 서로 책임을 미루기만 했다”며 “AI가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점을 감안해 전담 방역조직을 꾸리고, 컨트롤타워는 안전 문제를 총괄하는 국민안전처에 맡겨 촘촘한 대응체계를 구비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허경주 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27일 서울 송파구 잠실 계란공판장 내 한 도·소매업체에 상인이 신문지로 가게 문을 가려놨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27일 서울 송파구 잠실 계란공판장 내 한 도·소매업체에 상인이 신문지로 가게 문을 가려놨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로 타격을 입은 성남 모란시장. 닭이 있던 자리에 빈 철장만 놓여있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로 타격을 입은 성남 모란시장. 닭이 있던 자리에 빈 철장만 놓여있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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