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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무기는 사랑" 美 군인으론 첫 커밍아웃해 차별에 맞서다

입력
2015.06.21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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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공군 이등중사 레오나드 매트로비치(Leonard Matlovich)는 75년 3월 6일 자신이 게이임을 밝히는 편지를 써서 부대장에게 전달한다. 동성애자는 군 입대가 불가능했고, 복무 중 발각되면 불명예제대를 당하던 때였다. 현역 군인 첫 커밍아웃이었고, 두 달 뒤 시사주간지 타임의 표지 모델(사진 왼쪽)이 된다. 군과 보수 사회를 향한 그의 싸움은 그렇게 시작됐다.

매트로비치의 고향은 보수적인 남부 조지아주 서배너시다. 그의 아버지는 군인이었고, 가족은 모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19살이던 62년 입대했고, 베트남전에도 참전했다. 부상으로 상이기장 ‘퍼플하트’를 받았고, 동성무공훈장도 탔다. 매트로비치는 60년대 군대 내 인종갈등 극복을 위해 군이 도입한 ‘인종 관계개선 강좌’ 조교 직을 맡아 여러 부대를 다니며 강연했다. 인종주의의 폐해라면 고향에서 질리게 보고 듣고 느낀 덕에 그의 강의는 탁월했고, 나중에는 강사들을 교육하기도 했다. 그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알게 된 시점은 알려진 바 없다. 하지만 동성애자로서, 바로 자신이 차별의 피해자임을 자각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인사청문회의 강제 퇴역 조치에 맞서 그는 소송을 냈고, 80년 9월 연방지방법원에서 승소한다. 군은 항소하면서 매트로비치에겐 다양한 협박과 함께 금전적 합의를 종용한다. 그는 잔여 복무 급여와 퇴직금 등 16만 달러를 받고 합의에 응했다. 보수적인 대법원까지 갈 경우 그가 승리할 가능성이 희박했다고 한다.

에이즈 충격이 미국 사회를 휩쓸던 80년대 중반 그는 HIV-AIDS 교육ㆍ치료 캠페인의 선두에 섰다. 87년 방송에 출연해 자신이 HIV 보균자임을 밝히며, 레이건 행정부가 적절한 예방ㆍ치료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고 성토했다. 88년 5월 7일 캘리포니아주 의사당 광장 연설에서 그는 “AIDS에 맞서는 우리의 무기는 오직 하나, 사랑 사랑 사랑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 달여 뒤인 6월 22일 숨졌다. 향년 44세.

워싱턴D.C. 컨그레셔널 국립묘지의 그의 묘비(오른쪽)에는 ‘한 베테랑 게이’라는 문구아래 이렇게 적혀 있다. “군대는 내가 두 사람을 죽이니까 메달을 주었고, 한 사람을 사랑하니까 쫓아냈다.(When I was in the military, they gave me a medal for killing two men and a discharge for loving one.)” 이름을 새기지 않은 것은, 이름없는 수많은 게이 베테랑들을 더불어 추모해 달라는 의미였다.

1993년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은 군인의 성 지향을 묻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하는 이른바 ‘DADT(Don’t ask, don’t tell)’법안에 서명했다. 동성애자의 인권을 보호하려는 선의에서 비롯된 거였지만 실제로는 차별의 족쇄였다. 군대 내에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힐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 DADT 폐지 법안은 17년 뒤인 2010년 12월에야 미 상원을 통과했고, 2011년 9월 20일부터 시행됐다. 트랜스젠더는 아직 군 복무를 할 수 없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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