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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로 듣는 클래식…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의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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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로 듣는 클래식…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의 감동

입력
2020.05.05 04:3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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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라흐마니노프’에서 만난 피아니스트 김기경(왼쪽)과 이진욱 음악감독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관객에게 따뜻한 위로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고영권 기자
뮤지컬 ‘라흐마니노프’에서 만난 피아니스트 김기경(왼쪽)과 이진욱 음악감독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관객에게 따뜻한 위로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고영권 기자

피아노가 환희와 절망을 오가며 격정적인 선율을 쏟아 내면, 현악 4중주가 포근하게 그 소리들을 감싸 안는다. 배우들의 노랫말은 클래식에 실려 관객에게 다가간다. 극의 주인공은 작곡가 라흐마니노프. 공연은 시작부터 끝까지 라흐마니노프 음악으로 채워졌다.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를 관람한 관객들은 이렇게 말한다. “뮤지컬 보러 왔다 클래식 공연을 보고 간다.”

‘라흐마니노프’는 2016년 초연 이후 올해로 네 번째 공연 중인 대학로 화제작. 하지만 이번 시즌은 좀더 특별하다. 극강의 난도로 ‘피아니스트의 무덤’ ‘악마의 협주곡’이라 불리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이 처음으로 무대에 오르기 때문이다. “공연의 완성도를 높이려면 그 곡이 반드시 필요했어요. 이번엔 제대로 보여 주겠다고 칼을 갈았습니다.”

이진욱(40) 음악감독이 벼르고 벼른 ‘칼’은 피아니스트 김기경(35). 두 사람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동문이다. 이 감독은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기경을 삼고초려 끝에 무대에 세웠다. 8년 넘게 연락이 끊긴 탓에 SNS를 뒤져서 메시지를 보내 섭외했다. “기경이를 만나는 순간, 꿈꾸던 순간이 현실이 될 거라 확신했어요.” “진욱이 형이 음악감독인데, 안 할 이유가 없죠.” 최근 서울 신사동 카페에서 함께 마주한 두 사람의 얼굴엔 자부심이 어려 있었다.

뮤지컬 ‘라흐미나노프’에서 피아니스트와 현악기 연주자들은 주인공의 내면을 음악으로 들려주는 또 다른 배우다. HJ컬쳐 제공
뮤지컬 ‘라흐미나노프’에서 피아니스트와 현악기 연주자들은 주인공의 내면을 음악으로 들려주는 또 다른 배우다. HJ컬쳐 제공

‘라흐마니노프’는 교향곡 1번 실패 후 우울증과 신경쇠약에 걸린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와 그를 치료한 정신의학자 니콜라이 달 박사의 이야기를 그린 2인극이다. 달 박사는 공감 어린 대화로 라흐마니노프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그 덕분에 라흐마니노프는 오랜 슬럼프를 딛고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완성한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실제 달 박사에게 헌정됐다.

이 작품에서 음악의 힘은 절대적이다. 피아니스트와 현악 연주자들은 무대의 절반을 차지하고,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 3번과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등에서 선율을 차용한 뮤지컬 곡들을 직접 연주한다. 이 가운데 피아니스트는 라흐마니노프 내면의 목소리를 음악으로 들려주는, 사실상 극 전체의 지휘자다. 이 감독이 김기경을 고집한 또 다른 이유다.

“학창 시절 혹독한 실기 수업을 끝내고 잠시 쉴 때에도 김기경은 늘 연주를 했어요. 귀가 어찌나 행복한지 쉬는 시간이 기다려질 정도였죠. 내가 갑부라면 하이든처럼 그를 방에 가둬 놓고 매일 음악을 듣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피아노 전공인데 음악학, 음악사회학 같은 이론 수업을 듣는 것도 범상치 않았죠.”

김기경은 KBS서울신인음악콩쿠르, 베를린스타인웨이프라이즈 1위 등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지만 클래식에만 갇혀 있지 않았다. 독일 유학 시절 영화 ‘샤인’의 주인공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헬프갓을 다룬 다큐멘터리에 음악감독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샤인’에서 헬프갓이 정신분열증을 앓는 장면에도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이 등장한다. “커튼콜 무대에서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해 보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마침 제가 그 곡을 연습 중이었어요. 여러모로 신기한 인연이에요.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연주라 평소 고기를 열심히 먹고 있습니다.”

이진욱 음악감독은 “피아니스트 김기경을 위한 작품도 구상 중”이라고 귀띔했다. 고영권 기자
이진욱 음악감독은 “피아니스트 김기경을 위한 작품도 구상 중”이라고 귀띔했다. 고영권 기자
피아니스트 김기경은 6월에 토크쇼 형식의 공연 ‘클래식에 미치다’에서 연주하고, 8월에는 베토벤 협주곡 1번 협연 무대에 오른다. 뮤지컬 공연 틈틈이 클래식 유튜브 활동도 하고 있다. 고영권 기자
피아니스트 김기경은 6월에 토크쇼 형식의 공연 ‘클래식에 미치다’에서 연주하고, 8월에는 베토벤 협주곡 1번 협연 무대에 오른다. 뮤지컬 공연 틈틈이 클래식 유튜브 활동도 하고 있다. 고영권 기자

클래식은 많아야 4, 5차례 공연이지만, 뮤지컬은 두세 달 정도 거의 매일 무대에 올라야 한다. 힘을 안배하지 않으면 몸이 버티질 못한다. 피아니스트의 손 건강을 염려한 이 감독은 개막 전날 피아노 공장까지 찾아가 건반 누름이 가벼운 피아노를 직접 골라 오기도 했다.

“김기경이 아프지 말고, 외국에도 나가지 말고, 우리와 계속 함께해 줬으면 좋겠어요. 다음 시즌에 안 한다고 하면 답이 없어요.” 이 감독의 엄살에 김기경이 쑥스럽게 화답했다. “저에게도 훈련이 돼요. 대중과 호흡하는 방법도 배우고요. 배우가 누구냐에 따라 피아노를 달리 연주하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죠. 요즈음엔 원곡보다 뮤지컬 곡에 더 마음이 끌리기도 해요.”

뮤지컬 ‘라흐미나노프’는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와 그를 치료한 니콜라이 달 박사의 이야기를 그린다. HJ컬쳐 제공
뮤지컬 ‘라흐미나노프’는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와 그를 치료한 니콜라이 달 박사의 이야기를 그린다. HJ컬쳐 제공

이 감독이 ‘라흐마니노프’에 깊은 애정을 쏟는 데는 개인적 이유도 있다. 그는 열여덟 살 때 접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 3번 때문에 음악의 길에 들어섰다. 실용음악을 전공하면서 재즈나 인디밴드도 했지만 가슴을 뒤흔든 라흐마니노프의 선율을 잊지 못해 스물네 살에 한예종 음악학과를 택했다. 대중음악과 클래식, 양쪽을 아우른 이 감독의 음악 세계가 ‘라흐마니노프’ 그 자체다.

이 감독과 김기경은 “장르 구분은 무의미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클래식이든 뮤지컬이든 본령은 공감”이란 얘기였다. “음악은 외롭고 고단한 삶에 황홀한 순간을 선사해요. 그 순간만이라도 위안과 위로가 됐으면 합니다.”(이 감독) “라흐마니노프에게 달 박사가 말해요. ‘당신은 새로운 곡을 쓸 것이며 관객들은 당신을 사랑해 줄 것이다’라고. 누구나 존재만으로 박수받아 마땅하다는 말이에요. 제 연주가 관객에게 그런 의미로 다가갔으면 좋겠어요.”(김기경) 6월 21일까지 예스24스테이지.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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