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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유학자들의 묘지 다툼(4.10)

입력
2020.04.10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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묏자리를 둘러싼 집안 간 법적 쟁송을 산송이라 한다. 경기 파주의 윤관의 묘를 둘러싼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가문의 알력은 400년간 지속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묏자리를 둘러싼 집안 간 법적 쟁송을 산송이라 한다. 경기 파주의 윤관의 묘를 둘러싼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가문의 알력은 400년간 지속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산 자의 길흉화복이 집터나 묏자리에 좌우된다고 주장하는 풍수지리설은 통일신라 말기 중국서 유입돼 점차 살이 붙고, 조선 사대부들이 맹렬히 추종했다고 알려져 있다. 태조 이성계도 풍수를 따져 경복궁 터를 잡았다지만, 조선 유학자ㆍ관료들은 주자학ㆍ성리학에 한 줄도 안 나오는 저 미신 같은 믿음에 가문의 영화와 조상 숭배, 효행의 덕목을 얹어 가히 목숨을 걸었다.

묏자리를 둘러싼 분쟁, 즉 산송(山訟)도 끊이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영조 3년 3월 20일 임금이 “산송이 많으니 늑장(勒葬), 유장(誘葬) 투장(偸葬)의 유를 각별히 엄중하게 금단할 것을 전교”했다는 기록이 있다. 늑장, 유장, 투장은 모두 남의 산이나 묏자리에 몰래 또는 관계자를 꾀어 자기 집안의 묘를 쓰는 일을 일컫는 말이다.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의 400년 묘지 다툼은 가장 대표적인 산송의 예로 꼽힌다. 경기 파주시 광탄면의 윤관장군묘(사적 323호)는 고려 예종 때인 1111년 조성됐다. 윤관은 여진 정벌의 충신으로, 조선의 영의정 급인 문하시중을 지낸 인물이다. 윤관의 묘 바로 위 3m 지점에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의 무덤(경기도기념물 137호)이 들어선 건 550년 뒤인 1662년이었다. 당시에는 시일이 흘러 윤관 묘의 존재 자체가 모호했고, 그 묘역은 효종이 장인인 심지원 집안에 하사한 땅이었다.

분쟁은 100년 뒤인 1763년(영조 39년) 파평 윤씨 문중이 뒤늦게 윤관의 묘를 확인하느라 심지원의 묘역까지 훼손하면서 시작됐다. 묘역의 나무 한 그루만 베어도 쟁송의 빌미가 되던 때였다. 윤기가 짜르르한 두 명문가의 다툼은 지방 관아가 개입할 사안이 아니었다. 부득이 조정은 현장 실사까지 거친 뒤 두 묘의 자리를 그대로 유지하게 했고, 불복한 두 가문의 좌장을 2년 뒤 친히 문초하기도 했다.

갈등은 1965년 윤씨 문중에서 무덤 가에 담장(곡장ㆍ曲墻)을 두르면서 재현됐다. 담장 때문에 심씨 묘에 그늘이 든 거였다. 지루한 공방은 2005년 4월 10일, 윤씨 측이 새로운 묘역 부지 8,000여㎡를 심씨 측에 제공하는 것으로 합의됐다. 중앙문화재위원회는 2007년 12월 심지원의 묘 등 19기의 이전을 승인했고, 이듬해 5월 이장이 완료됐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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