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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 무대인생 배우 박정자 “저의 화려한 여든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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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 무대인생 배우 박정자 “저의 화려한 여든을 기다립니다”

입력
2020.01.30 04:4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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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박정자는 스스로 “연극이라는 종교에 빠진 맹신자”라고 말한다. “대모”라는 상찬도 거부한다. 오로지 “연극배우 박정자”면 족하다. 고영권 기자
배우 박정자는 스스로 “연극이라는 종교에 빠진 맹신자”라고 말한다. “대모”라는 상찬도 거부한다. 오로지 “연극배우 박정자”면 족하다. 고영권 기자

지난 28일 서울 동숭동 한국뮤지컬협회 연습실에서 연극배우 박정자(78)를 만났을 때, 손에 든 다이어리부터 눈에 들어왔다. 겉표지에 연필로 꾹꾹 그려 넣은 그림이 어찌나 귀여운지. 눈치챈 듯 이내 할머니 미소다. “우리 손녀 솜씨예요. 해마다 이렇게 나를 그려 줘요.” 그림을 가만 들여다보니 연극 ‘노래처럼 말해줘’ 포스터 속 박정자다. “제가 할머니라는 게 낯선가요? 저도 곧 여든 살인걸요.”

우리 나이로 내년 80세. 박정자는 이화여대 2학년이던 1962년 연극 ‘페드라’로 데뷔한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무대에 올랐다. 이번 작품 ‘노래처럼 말해줘’는 크로스오버 형식의 1인극으로 58년 배우 인생을 돌아보는 작품이다. 다음달 6일부터 열흘간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무대에 오른다. 박정자는 “무대에서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게 부끄럽고 겸연쩍다”면서도 “배우로서 한 번쯤 거쳐 가야 할 시간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박정자의 연기 인생을 회고하는 연극 ‘노래처럼 말해줘’. 뮤직웰 제공
박정자의 연기 인생을 회고하는 연극 ‘노래처럼 말해줘’. 뮤직웰 제공

무대 위에서 박정자는 자신이 출연한 예전 작품 속 인물들의 목소리를 빌리고, 노래 6곡까지 곁들여 가며 인생의 희로애락을 펼쳐 놓는다. “인생을 정리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에요. 언제나 미완성이니까요. 다만, 무대 위에서 살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지나온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져요. 이제야 철도 좀 드는 거 같고.”

60년 무대 비결을 묻자 간단한 답이 돌아왔다. “단순해서 그래요. 잡념도 별로 없어요. 아주 미련한 거야, 내가. 그런데 그 미련함 덕분에 이런 축복을 받았네요.” 박정자에겐 연극이 곧 “인생이자 운명”이었다. 힘들다고 느낀 적도, 배우가 아닌 다른 일을 꿈꾼 적도 없다. “배우는 저에게는 직업이 아니에요. 직업이었다면 힘들었을지도 모르죠. 배우가 된 건, 제 평생 가장 훌륭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손녀에게도 말했어요. 다시 태어나도 나는 연극배우가 될 거라고.” 한마디는 덧붙였다. “그런데 한국이 아니라 영국처럼 연극 뿌리가 탄탄한 곳에서 태어나면 더 좋겠어요(웃음).”

박정자가 출연한 연극.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19 그리고 80’ ‘신의 아그네스’ ‘페드라’ ‘대머리 여가수’.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정자가 출연한 연극.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19 그리고 80’ ‘신의 아그네스’ ‘페드라’ ‘대머리 여가수’.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정자의 무대 인생이 시작된 건 아홉 살이던 1950년이었다. 현재 서울시의회 건물 근처 부민극장에서 본 ‘원술랑’에 그만 푹 빠졌다. 지금도 ‘원술랑’은 생생히 기억한다. 이후 발바닥이 닳도록 극장을 드나들었다. 배우가 되겠다는 결심 같은 것도 필요치 않았다. 어느 순간 무대 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뿐이다. 그 뒤 쌓인 작품 수가 140여편에 달한다.

두 아이를 임신했을 때도 만삭으로 무대에 올랐다.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날에도 관객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었다. 무대 위 시간은 그가 “살아 내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밥 먹고, 잠자고, 생각하는, 평범한 그 일들과 다르지 않아요. 그러니 꾀 부리거나 엄살 떨 수가 없죠.”

때론 야속하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오래 전 일이에요. 정동극장에서 ‘신의 아그네스’를 공연했는데, 공연 전날 사고를 당했어요. 무대에 오를 수 없을 정도로 다쳤는데도 공연을 강행했어요. 그러다 결국 2막 무대에 대본을 들고 올라갔죠. 아픈 몸을 보고 관객이 이해해 주시라 믿었는데, 환불 소동이 났어요.” 때론 냉정하고 잔인한 것이 관객이지만, 그 관객 덕에 무대가 있기에 관객은 영원한 짝사랑 상대다.

그렇게 무대를 사랑해서일까. 가끔은 무대 안팎 경계가 무너지기도 한다. “한번은 부부싸움을 하는데 남편이 저더러 ‘연기한다’는 거예요. 진심을 다해 화내고 있었는데 연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니, 저에겐 치명적이었어요. 무대와 일상이 섞여 버린 거지요.” 사랑엔 이유가 없다. 뭐가 그리 좋았냐고 물으니 “그러게요. 저도 갑자기 궁금해지네요”란 답이 돌아왔다. 정말 모르겠다는 듯 “앞으로 그 매력을 더 열심히 찾아봐야겠다”며 웃었다.

박정자는 “좋은 작품, 좋은 관객을 만나고 싶은 바람밖에 없다”고 말했다. 고영권 기자
박정자는 “좋은 작품, 좋은 관객을 만나고 싶은 바람밖에 없다”고 말했다. 고영권 기자

‘노래처럼 말해줘’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일흔아홉 살이 되면 선택은 두 가지예요. 죽든지 아니면 여든 살이 되든지. 틀어막을 게 하나도 없이 구멍 난 배에 타고 있는 나이 같지만, 여든 살의 연극배우가 얼마나 할 일이 많은지 때때로 나는 생각해요.”

대사처럼 박정자는 여든 살을 기다린다. 19세 청년 헤롤드와 80세 노인 모드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연극 ‘19 그리고 80’의 7번째 공연을 내년에 한다. 2003년 첫 공연 때 “여든 살까지 이 작품을 하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킬 날이 다가오고 있다. 동료 윤석화가 연출을 맡겠다고 나섰다. “저의 여든 살이 얼마나 화려할까요.” 표정엔 설렘이 가득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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