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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GMO의 또 다른 이름, BE

입력
2020.01.04 04:4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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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생명공학과 유전공학은 학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소비자에게 BE는 GEO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니 전혀 다른 의미로까지 읽힐 수 있다. 무엇보다 세계인에게 익숙한 GMO라는 표현을 굳이 사용하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사실 생명공학과 유전공학은 학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소비자에게 BE는 GEO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니 전혀 다른 의미로까지 읽힐 수 있다. 무엇보다 세계인에게 익숙한 GMO라는 표현을 굳이 사용하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게티이미지뱅크

미국은 GMO 최강국이다. 1996년 처음으로 GMO의 상업적 재배를 허가했고, 2018년 기준으로 26개 재배국 가운데 가장 넓은 GMO 농지를 보유했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표시제가 없었다. 콩이나 옥수수 같은 농작물 자체 또는 이들을 재료로 만든 수많은 가공식품에 GMO 표시가 없었다. 마침내 올해 1일부터 연방정부 차원에서 표시제가 시행됐다. 그러나 막상 내용을 들여다보니 실망스러웠다. 원래의 의도와 달리 표시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먼저 이름이 낯설다. 한국을 포함해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명칭은 GMO이다. 유전자를 변형한(Genetically Modified) 식물이나 동물 같은 생명체(Organism)라는 의미이다. 미국에서는 GEO, 즉 유전공학(Genetically Engineered)으로 만든 생명체라는 말도 사용돼 왔다. 그런데 이번에 표기되는 이름은 BE이다. 무슨 뜻일까. 생명공학(BioEngineered)의 약어이다. 관련식품을 제조, 수입, 판매하는 업체들은 둘 가운데 하나를 문자나 심벌로 표시해야 한다.

사실 생명공학과 유전공학은 학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소비자에게 BE는 GEO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니 전혀 다른 의미로까지 읽힐 수 있다. 무엇보다 세계인에게 익숙한 GMO라는 표현을 굳이 사용하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문득 홍길동전의 한 대목이 떠오른 건 지나친 비약일까. 홍길동은 서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서러움을 겪었다. 사회적 강요에 의해 개인의 의사가 무시됐다. 미국의 표시제는 소비자에게 ‘GMO를 GMO라 부르지 못하게’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국내 바이오안전성정보센터(KBCH)가 발간하는 백서에 따르면, 실제로 미국의 소비자단체들은 BE가 일반인에게 생소해 오히려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GMO나 GEO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느닷없이 새로운 용어가 등장해 버린 데 대한 우려였다.

표기법에 다른 선택지도 있다는 사실은 더욱 의아했다. 그저 QR코드를 부착해도 된다. 식품에는 ‘보다 자세한 정보를 검색하려면 포장 부위나 아이콘을 스캔하라’는 설명 문구가 제시된다. QR코드를 인식하는 스마트폰이 있어야 성분을 확인할 수 있다. 스마트폰을 갖지 않은 소비자에게는 아예 알려주지 않겠다는 것일까. 갖고 있다 한들, 식품을 구매할 때 일일이 스캔해 볼 소비자가 얼마나 될까.

예외도 있다. 레스토랑이나 이동식당에서 제공되는 음식에는 표시할 필요가 없다. 간혹 소비자의 의사를 존중하는 업체에서 ‘우리는 GMO를 재료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벽에 붙여 놓지 않고서야 음식의 성분을 알 수 없다.

관련업체들은 나름대로의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안전성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표시가 명확해지면 근거 없는 사회적 불안감을 야기하고, 여러 이유에서 물가가 상승해 소비자가 더욱 부담스러워진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2018년 미국 버몬트대학 연구진은 이 문제에 대해 흥미로운 결과를 발표했다. 버몬트주에서는 2016년 7월 미국에서 처음으로 GMO 표시제 법안이 발효됐다. 시행 2년 후, 버몬트주의 가공식품 판매량은 시행 전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또한 GMO를 반대하는 주민의 비율은 19%나 감소했다. 연구진은 투명한 정보공개가 소비자의 신뢰감을 상승시킨 결과라고 밝혔다. BE나 QR코드보다 모두에게 익숙한 GMO라 표시하는 것이 낫다고 결론을 내린 셈이었다.

원래 표시제는 소비자가 알고 선택할 권리를 보장한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제도이다. 절차는 밟되 정작 소비자가 알아차리기 힘들게 하는 제도는 문제가 있다.

김훈기 홍익대 교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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