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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전문가가 죽지 않으려면

입력
2019.11.26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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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미국에서 조 티펜스라는 이름의 60대 암 환자가 이 성분의 강아지 구충제를 3개월 복용한 후 암을 완치했다는 내용의 유튜브 영상을 올렸다. 이 영상은 삽시간에 암 환자들 사이에 퍼졌고 펜벤다졸 열풍이 시작되었다. 구충제의 항암 효과에 대한 연구는 새롭지 않다. 다만 사람에 대한 효과가 입증된 적은 없다. 사진은 지난 4월 조 티펜스가 KOCO 5 News와 인터뷰하는 장면 캡처.
지난 9월 미국에서 조 티펜스라는 이름의 60대 암 환자가 이 성분의 강아지 구충제를 3개월 복용한 후 암을 완치했다는 내용의 유튜브 영상을 올렸다. 이 영상은 삽시간에 암 환자들 사이에 퍼졌고 펜벤다졸 열풍이 시작되었다. 구충제의 항암 효과에 대한 연구는 새롭지 않다. 다만 사람에 대한 효과가 입증된 적은 없다. 사진은 지난 4월 조 티펜스가 KOCO 5 News와 인터뷰하는 장면 캡처.

주말에 투병 중인 선배에게 문병을 갔다. 배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 병원에 실려갔는데 난소암 4기라는 선고를 받았단다. 암세포가 목 림프절, 기도, 심장까지 번져 어렵다던 수술을 간신히 받은 참이었다. 독한 항암제 치료에 머리는 다 빠졌지만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는다. 수술을 하고 나니 몸이 가벼워졌다며 좋아하는 선배를 보며 그 의지와 긍정성에 감탄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선배가 내게 말한다. “나 펜벤다졸 구했어.” 아뿔싸. 교수인 선배의 입에서 이 단어가 튀어나올 줄이야.

펜벤다졸은 동물용 구충제에 사용되는 성분이다. 지난 9월 미국에서 조 티펜스라는 이름의 60대 암 환자가 이 성분의 강아지 구충제를 3개월 복용한 후 암을 완치했다는 내용의 유튜브 영상을 올렸다. 이 영상은 삽시간에 암 환자들 사이에 퍼졌고 펜벤다졸 열풍이 시작되었다. 구충제의 항암 효과에 대한 연구는 새롭지 않다. 다만 사람에 대한 효과가 입증된 적은 없다. 장기 복용하면 혈액, 신경, 간 등에 치명적인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 이에 식품의약품안전처, 약사회, 암학회, 의사협회, 동물약국협회 등 전문가 단체가 총출동하여 복용 자제를 촉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말기 암 진단을 받은 일반 환자와 연예인의 복용담은 전문가의 권고보다 훨씬 강력해 보인다. 강아지 구충제는 품절 사태가 일어났고, 비슷한 성분의 구충제들 역시 판매가 급증했다. 유튜브 같은 소셜 미디어가 없었다면 펜벤다졸 열풍이 이 정도는 아니었을 거라고 개탄하는 전문가들의 한숨 섞인 목소리도 들린다.

전문가는 위기다. 미국의 러시아 문제 전문가인 톰 니컬스는 소셜 미디어 시대에 전문가와 전문지식은 죽었다고 주장한다. 국내에는 ‘전문가와 강적들: 나도 너만큼 알아’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책의 내용이다. 이 책에서는 가짜 전문가들이 판을 치며 더 이상 전문가가 신뢰받지 못하는 사례들로 가득하다. 온라인에서는 수많은 정보를 빠르게 접할 수 있다. 그 정보의 근거나 출처, 공신력은 종종 간과된다. 덕분에 학교에는 교수만큼 충분히 알고 있다는 학생이, 병원에는 자신의 증상을 의사만큼 잘 안다는 환자가 넘쳐난다. 대신 일반인과 전문가 간의 의사 소통은 더 빨리 붕괴되었다. 예능 프로그램이나 유튜브 영상을 통해 연예인들이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해 주는데 수십 년 동안 한 분야만 연구해온 전문가들의 어려운 설명을 왜 굳이 이해해야 하느냐 말이다. 이 책의 내용은 미국 사례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우리나라 상황에 적용하는 데 큰 무리가 없다.

일반인이 전문가를 믿지 않게 된 데는 전문가의 책임도 있다. 전문가도 종종 틀린다. 틀리는 방식은 노골적인 사기부터, 자신의 능력에 대한 오만과 자신감 등 다양하다고 톰 니컬스는 주장한다. 일반인의 시각에서 그들의 심정과 절박한 사정을 이해하려는 낮은 자세도 부족했다. 펜벤다졸을 항암 치료에 사용하는 것을 우려하는 다수의 전문가들이 있는 반면, 전문가를 자칭하는 일부는 유튜브 영상으로 펜벤다졸 사용법을 홍보하기에 일반인들은 더 혼란스럽다. 이럴 때는 확증 편향이 어김없이 작동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인간의 본능 말이다. 전문가들은 개인이 정확하고 올바른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도록 과학적 근거와 균형 있는 정보를 제공할 책임이 있다. 전문가들은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톰 니컬스의 암울한 진단이 틀렸다는 것을.

암을 이겨 내겠다고 의지를 불태우는 선배에게 나는 조심스럽게 말한다. 강아지 구충제에 항암 치료를 맡길지 말지는 선배의 선택이지만 그 부작용을 우려하는 전문가들을 좀 믿어 보라고. 과학적 근거 없이 소수 개인의 경험만으로 항암과 같은 중요한 의사 선택을 하기에는 선배의 삶은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하다고.

백혜진 식품의약품안전처 소비자위해예방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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