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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이 망하믄 나라가 망하는거여” 깡촌 할매들은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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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이 망하믄 나라가 망하는거여” 깡촌 할매들은 강했다

입력
2019.06.13 17:08
수정
2019.06.13 19:2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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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대구 산골마을 우록리 6명 할머니들의 삶은 독하게 힘겹고 치열했다. ‘할매들의 탄생’은 그 고난의 생애 속에서 희망을 끌어 올리며 분투한 구술 자서전이다. 왼쪽부터 임혜순(77) 이태경(84) 곽판이(91) 조순이(82) 유옥란(77) 김효실(65) 할머니다. 글항아리 제공.
북 대구 산골마을 우록리 6명 할머니들의 삶은 독하게 힘겹고 치열했다. ‘할매들의 탄생’은 그 고난의 생애 속에서 희망을 끌어 올리며 분투한 구술 자서전이다. 왼쪽부터 임혜순(77) 이태경(84) 곽판이(91) 조순이(82) 유옥란(77) 김효실(65) 할머니다. 글항아리 제공.

경상북도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산골 마을. 일제 해방 소식이 한참 지나서야 전해지고, 6ㆍ25 전쟁의 포화도 비켜 갔을 만큼 외딴 곳이다. 마을은 여전히 깡촌이다. 버스 노선도 없고, 선거 때 정치인 구경하기도 힘들다. 조순이 할머니(82)는 스물 한 살에 결혼해 이 마을에서 살게 됐다. 농사일은 뒷전이고 밖으로만 나도는 남편, 없는 살림에도 남에게 퍼주기만 좋아하는 시어머니, 줄줄이 딸린 일곱 명의 시형제가 조 할머니를 맞았다. 아이 넷을 낳은 조 할머니는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죽지 않을 만큼 일했다. 고시원 청소에 식당 보조까지 가리지 않았다. 그렇게 가족을 부양하며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워내고 남은 것은 성치 않은 몸뿐이다. “내 살믄서 고생 말고 없었다.” 억울해 하다가도 조 할머니는 웃는다. “내 이만치 했으마 잘했는 거 아이겠습니까.”

‘할매의 탄생’엔 조 할머니를 비롯한 할머니 6명의 구구절절한 생애가 펼쳐진다. 고향도, 나이도 다르지만 우록리에서 70년 세월을 동고동락한 이웃사촌들이다. 구술생애사 작가 최현숙(62)씨가 1년 동안 할머니들을 인터뷰했다. 가족과 사회에서 밀려나고 방치돼 태극기부대에서 위안을 찾는 남성 노인들의 삶을 조망한 ‘할배의 탄생’(2016)이 그의 전작이다.

‘농촌’과 ‘여성’과 ‘노인’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약한 고리들의 조합이다. 할머니들의 힘겨운 삶을 긍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고작이었다. 그도 아니면 할머니들의 꾸밈 없는 모습을 감동 아니면 유머 코드로 풀어내 소비했다. 할머니들이 직접 구술한 삶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고단했지만 에너지가 넘쳤고, 억압 받았지만 당당했다.

저자는 할머니들의 고된 노동이 삶을 지켜내는 자부심이자 버팀목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할머니들은 평생 노동으로 아이들을 먹이고 가르쳤다. 집도 짓고 자식들에게 물려줄 땅도 샀다. 할머니들이 세상에 맞서 자신과 가족을 지킬 수 있었던 힘은 역설적으로 가난과 고생이었던 셈이다. 저자는 농촌을 떠나 도시로 탈출한 또래의 도시 노인들보다 노동의 힘을 바탕으로 삶을 주체적으로 일궈낸 우곡 할머니들의 자긍심과 마음의 여유가 더 컸다고 분석한다.

할매들의 탄생

최현숙 지음

글항아리 발행ㆍ472쪾ㆍ1만9,800원

할머니들은 ‘많이 배우고 높으신 누구들보다’ 더 깨어 있었다. “남자든 여자든 똑 같은 기준으로 봐야 한다, 바람 났다고 왜 남자만 봐주나. 여자도 봐줘야지”라며 성 평등을 부르짖은 유옥란(77) 할머니, “사람이 죽으마 나무둥치(뭉치)라. 나 죽으면 화장해라,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죽음 앞에서 초연한 태도를 보이는 곽판이(91) 할머니까지. 학교 문턱도 밟지 못한 할머니들이지만 깡치(‘밑에 가라앉은 앙금이나 찌꺼기’를 일컫는 경상도 사투리)로 버텨온 삶에서 길어 올린 지혜와 통찰이다.

조순이 할머니는 돈의 논리로만 돌아가는 세상을 향해 일침을 가한다. “시골들이 텅텅 비어가 땅이 놀고, 지운 다 빠진 늙은이들만 남아 밭이나 쪼매썩 갈고 (…) 사람들 밥 대주는 촌이 이래 망가지는 거 그기 세상이 다 한테 망가지는 거라 생각합니더. 쌀 만들어 대주는 시골들이 그래 낱낱이 망쳐지믄, 그기 다 한나란데 서울이고 뭐고 마 잘될리가 없지예.”

인생에 대해 “아주 좋지도 안하고, 나쁘지도 안 했다”고 담담히 말하는 우록 할머니들의 삶에는 강한 사투리의 억양만큼이나 짙은 힘이 베어 있다. 그 힘은 부와 권력이 아닌, 할머니들의 성실한 노동과 질긴 인내에서 나왔다는 소박한 의미를 책은 생생하게 일깨워 준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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