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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로로 ‘기억상실증’까지... 하지만 아무 원망도, 후회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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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로로 ‘기억상실증’까지... 하지만 아무 원망도, 후회도 없어요

입력
2019.06.13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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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자는 것이 신념이자 가훈

이대주 강동어르신행복센터(노인종합복지관) 관장이 지난 시절을 이야기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김광원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이대주 강동어르신행복센터(노인종합복지관) 관장이 지난 시절을 이야기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김광원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IMF 직후 지역자활센터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다가 과로로 쓰러져 부분기억상실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IMF 직후 지역자활센터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다가 과로로 쓰러져 부분기억상실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내가 누구죠?”

2000년, 이대주(50) 강동어르신센터 관장은 업무 후 퇴근하여 피곤하다고 하곤 쓰러졌다. 눈을 떠보니 머릿속이 텅 비었다. 놀라서 같이 병원을 찾아 주었던 이들도 모두 처음 본 사람들이었다. 급하게 서울 병원으로 이송 후에도 가까이 지내던 사람은 물론 아내와 부모님, 가족까지도 몰라봤을 만큼 상황이 심각했다. 눈만 뜬 채 연명하는 시간이었다.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 끝내 기억을 온전히 돌려받지 못했지만...

병원 입원 후 치료를 받으며 며칠이 지나고, 기억이 한 뼘쯤 돌아왔다. 고등학교 시절, 아직 하늘이 새까만 새벽에 대문을 나서서 숨이 턱에 닿도록 뛰면서 신문을 돌리던 기억이었다. 가난한 농가 풍경과 주름진 얼굴이 스쳤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생전 처음 부모님을 본 것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쓰러지던 즈음의 기억도 조금씩 살아났다. 이 관장은 그 일이 있기 3년 전인 1997년부터 지역자활센터에서 사회복지사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복지 분야에서 새롭게 시도되는 사업이었다. 어려운 이들을 경제적으로 무작정 물질적 원조로 지원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기술을 습득해서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적극적인 개념의 복지였다. 이 관장은 협동조합의 모범 사례로 거론되는 스페인의 몬드라곤 협동조합을 모델로 실직자들의 기술습득을 위한 특화사업을 기획해서 진행했다.

사업에 박차를 가할 즈음 ‘IMF 외환위기’가 더욱 거세게 찾아왔다.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쏟아졌다. 가족들에게 실직을 고백하지 못하고 출근하는 차림으로 쉼터를 찾아오는 이들도 많았다. 당황스럽진 않았다. 마치 경제 사태를 예견하기라도 한 듯 실직자를 위한 프로그램을 구축해 둔 덕분이었다. 힘들었지만 미소를 잃지 않았다.

“남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열망이 강했죠. 그 열망이 고향도 아닌 대구라는 낯설고 생소한 곳에서 활동하는 저를 붙잡고 있었죠.”

이 관장은 원래 신학생이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열망이 생겼다. 신학이 책상머리 학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신학교를 그만두고 빈민촌으로 들어갔다. 그들과 함께 살면서 레코드 테이프 장사, 순대 장사를 하기도 하면서 친해졌지만 군복무 때문에 마을을 떠났다. 제대할 무렵 우연히 대구대학교 설립자이신 고(故) 이태영 박사의 칼럼을 접했다. 그 글 한 편에 나약한 자를 위한 생각에 공감이 되어 장애인 또는 소외된 이들에 대한 일에 뛰어들자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 후 아무 연고도 없던 대구까지 내려와서 사회복지를 공부하게 되었다.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야 할 처지였지만 힘든 줄도 몰랐다. 어서 빨리 현장에 뛰어들고 싶은 조급증이 가장 힘들었다. 자활센터에서 업무가 쏟아질 때도 업무를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남을 돕는 일에 뛰어들길 간절하게 바라던 삶이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기억이 돌아왔지만 온전해지지는 않았어요. 병원은 ‘과로로 인한 부분기억상실증’이라는 진단을 내렸어요. 그런 일을 겪고 난 후에도 아무 후회가 없었어요. 제가 하고 싶던 일이니까요.”

열망에 가득 찬 마음은 그대로였지만 일하는 방식은 바뀌었다. 다시 쓰러지지 않기 위해 업무의 효율을 높였다. 설비기술자로 일하다가 직장은 잃은 실직자와 함께 ‘녹색마을’이라는 건축팀을 구성했다. 영업은 이 관장이 맡았다. 그 결과 ‘녹색마을’은 2009년 사업자등록증을 발급받았고, 연매출 수억 원을 달성할 정도로 성장했다.

◇ 가장 아름다운 삶은 ‘계획 없는 삶’

실직자 자활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느낀 점이 많았다. 성실한 사람은 무너져도 다시 일어선다는 확신이었다. 절박한 사정을 호소하더라도 의지가 부족하면 중도에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 전전하더라는 것이었다.

“자립에 성공한 분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아요. 다른 이들을 도우려고 애쓰는 분들이 많아요. 제가 근무하는 곳을 따라다니면서 정기 후원을 해주는 분들도 많아요. 성실이 가장 훌륭한 선(善)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념이 확고하다 보니 결혼과 관련해서도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었다. 아내가 될 사람의 조건 중의 하나가 ‘신혼여행 때 죽을 각오를 하라’는 것이었다. 신혼여행을 휴양지 대신 중국으로 들어가 탈북자 구호에 나설 계획을 잡아놓은 까닭이었다. 그것이 가장 훌륭한 출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결혼 후 가장 끔찍한 고비가 찾아왔다. 딸이 태어난 지 이틀째 되던 날, 의사가 “아기 울음이 이상하다”면서 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검사결과 이유 없이 소장이 괴사했다는 진단이 나왔다. 의사는 포기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의사를 설득해 2번이나 개복해 소장절제 수술을 진행했다.

어렵게 목숨을 건진 딸에게 늘 ‘기쁘게 살아라’고 말했다. 초등학생 때 회장을 다년간 하고, 일부 과목을 통해 영재교육원을 주선 받을 만큼 영리했지만 재능을 꽃피우면서 자유롭게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중국 유학을 보냈다. 3년여 만에 한국에 돌아온 뒤 검정고시를 거쳐, 지금은 대만의 타이페이 국립대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 건강하게 잘 자라주는 것 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지만 늘 강조하는 건 있었다.

“어떤 일을 할지는 자신의 선택이지만, 무슨 일을 하든 꼭 남을 돕는 직업을 선택하라고 했어요. 저도 그런 일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인격적으로 성장했듯이, 딸도 꼭 그런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이 관장 자신의 향후 계획도 딸에게 조언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앞으로 제게 어떤 일이 닥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늘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것 외에는 어떤 구체적인 계획도 없어요. 처음 품었던 간절한 마음 하나로 끝까지 열심히 살아가고 싶습니다.”

신정미 객원기자(사회복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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