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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대 나온 30대가 퇴사하고 ‘월수금 청소부’가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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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대 나온 30대가 퇴사하고 ‘월수금 청소부’가 된 이유

입력
2019.03.29 04:4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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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청소일 하는데요’ 만화 출간한 일러스트 작가 김예지씨 

김예지씨는 “이전에는 저도 직업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청소일을 하고 나서 어떤 일을 하든 평범한 노동자라고 생각한다. 자기 인생에 책임감을 갖고 열심히 사는 사람은 모두 멋지다”고 말했다. 류효진 기자
김예지씨는 “이전에는 저도 직업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청소일을 하고 나서 어떤 일을 하든 평범한 노동자라고 생각한다. 자기 인생에 책임감을 갖고 열심히 사는 사람은 모두 멋지다”고 말했다. 류효진 기자

여기, 두 개의 삶을 사는 30대가 있다. 월, 수, 금요일에는 청소부가 돼 다세대주택, 사무실, 병원을 쓸고 닦는다. 화, 목요일에는 일러스트 작가로 변신한다. 이중생활의 주인공은 김예지씨. 최근 자신의 일상을 그린 만화책 ‘저 청소일 하는데요?’(21세기북스 발행)를 펴냈다. 19일 서울 남대문로 한국일보사에서 만난 김씨는 “카페에 있을 때 저를 알아보고 사인을 부탁하는 분이 종종 있다. 신기하고 얼떨떨하다. 제 삶을 책으로 냈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했는데 예상치 못한 반응까지 얻어 감사하다”고 말했다. 독립출판으로 낸 동명의 책이 2쇄 2,000부를 찍자 대형출판사가 책 출간 제의를 했고, ISBN코드가 찍힌 책을 정식 출간한지 한달 반 만에 3쇄를 찍었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김예지씨가 졸업 후 갖게 된 첫 직업은 온라인쇼핑몰의 상품스타일리스트였다. 백화점 상품스타일리스트가 신상품으로 쇼윈도를 꾸미는 것처럼, 쇼핑몰에서 팔 물건을 사진이 잘 찍히도록 스튜디오에서 배치하는 업무다. 김씨는 “가구부터 옷, 신발, 문구, 음식까지 다양한 제품을 배치하는 일은 재미있었지만, 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다니던 직장을 1년 만에 그만뒀다. 언제 잘릴지 모를 비정규직이란 현실도 직업에 확신을 갖지 못하게 했다.

무엇보다 사회생활 후 알게 된 불안증이 발목을 잡았다. 김씨는 “학교 다닐 때는 제가 소심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직장 다녀보니 업무 수행 때 제대로 못 해낼까 봐 너무 두려워했다. 그게 제 자신에게 피해가 갈 정도라 병원 상담을 받았다”고 말했다. 김씨에게 어머니가 청소 일을 제안했다. 시간 관리하기 좋고 벌이도 괜찮다는 이유였다. 직장 다니며 회사 눈치 보지 말고 청소 일하고 병원 치료 받으며 나머지 시간에 그림도 그리면 좋겠다는 ‘빅 피처’를 듣고 주저 없이 청소 일을 시작했다. 쇼핑몰 퇴사 후 ‘그림(일러스트) 그릴 수 있는 직장’ 입사에 줄줄이 떨어지고 옷가게 판매원, 보험회사 비서 등등 아르바이트를 했던 찰나였다. 10년 간 했던 야쿠르트 배달업을 그만 둔 어머니도 김씨를 따라나서 한 조로 일했다.

'저 청소일 하는데요?' 저자 김예지 씨. 류효진 기자
'저 청소일 하는데요?' 저자 김예지 씨. 류효진 기자

청소 일을 시작하고 겨울 한파와 여름 폭염, 봄날의 미세먼지를 매일 체감했다. 쓰레기 분리수거를 제대로 하지 않거나, 개념 없이 화장실 쓰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공동 화장실을 쓸 때면, 며칠에 한 번 청소를 되는지 대장을 훑어보는 직업병이 생겼다. 김씨는 “청소를 하면서 생각 없이 행동했던 저 자신을 반성하게 됐다”고 말했다. ‘업무 파트너’인 엄마와는 관계가 더 돈독해졌다. “중소기업 대리보다 좀 더 높은 수입”으로 4년 만에 대학 학자금 대출을 다 갚았다. 꿈에 그리던 작업실을 얻고, 치아 교정도 시작했다. 김씨는 “청소 일이 자아실현을 하는 일은 아니지만 제 꿈을 실현하는데 좋은 수단이 됐다”고 덧붙였다.

‘사람들 이목이 불편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일을 시작하고 나서 사람들이 제 나이에 청소일 하는 걸 이상하게 본다는 걸 알았다”고 답했다. “책 내기 전에 출판계 사정을 몰랐던 것처럼 청소업무도 관련 지식이 없으니까 편견도 없었어요. 친구들이, 이웃 어른들이 무슨 일 하냐고 물어봐서 ‘청소일 하는데요’라고 대답할 때 누군가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거든요. 그때 ‘이 나이에 할 일이 아니구나’ 생각하는 거죠.” 소개팅에서, 동창회에서 “청소 일을 왜 하는지를 설명”할 때는 이름만 대면 설명이 필요 없는 직장에 다니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 청소 일을 하지만, 김예지씨의 작품을 찾는 이는 없었다. 김씨는 재작년 독립출판물 제작과정을 배웠고 일상을 밑천 삼아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김씨는 “세상의 편견과 제 자신의 편견 사이에서 어떤 선택이 옳은 것인지 고민했다. 그 고민을 스스로 체크해보기 위해 책을 냈다”고 말했다. 2017년 자비로 찍은 만화책이 나왔고 1년간 입소문을 타며 2,000부를 찍었다. 서점 북콘서트의 ‘작가’로 초대되면서 독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책에 사인을 했다. “친구들한테 청소 일할 때 자괴감 든다고 몇 번 말하긴 했지만 깊이 얘기한 적은 없었거든요. 괜찮은 척 많이 했는데, 사실 속으로 너무 하고 싶던 이야기였어요. 힘들어서 안 괜찮다고. 이 책으로 위로 받았다는 연락을 많이 받았어요. 이 책이 반향이 있다면 공감하고 응원하는 메시지 때문이겠죠.” 김씨는 두 번째 책을 준비 중이다. 대학 졸업 후 줄곧 앓았던 사회불안증의 치유 과정을 만화로 그릴 예정이다. “청소는 생계를 해결하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훌륭한 일이에요. 앞으로 다른 일로 생계가 해결될 때까지 책 쓰며 청소일 계속 할 거예요. 청소일 하는 분을 보면 자기 인생을 성실하게 사는, 책임감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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