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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베이싱스토크 폭동(3.27)

입력
2019.03.27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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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햄프셔의 베이싱스토크 주민들이 구세군의 금주 캠페인에 반발, 1881년 3월 27일 폭동을 일으켰다. 당시 베이싱스토크 시 청사와 광장. wuhstry.wordpress.com
잉글랜드 햄프셔의 베이싱스토크 주민들이 구세군의 금주 캠페인에 반발, 1881년 3월 27일 폭동을 일으켰다. 당시 베이싱스토크 시 청사와 광장. wuhstry.wordpress.com

베이싱스토크(Basinstoke)는 잉글랜드 남부 햄프셔주의 인구 10만명쯤 되는 도시다. 런던에서 차로 약 한 시간이면 닿고, 한 시간쯤 더 가면 성공회 주교좌 성당이 있는 솔즈베리다. 교통 요지여서 그랬는지, 고래로 베이싱스토크는 잉글랜드에서 손꼽히는 술의 도시였다. 맥주나 위스키 양조 명가들 덕이 아니라 그냥 술집이 많고 술꾼이 많아서 유명했다는 거다. 구세군(Salvation Army)의 창시자인 감리교회 목사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 1829~1912)가 1880년대 초 ‘신의 말씀’을 가로막는 악의 상징으로 알코올을 지목, 금주ㆍ절제 운동의 대상지로 선정한 곳도 베이싱스토크였다.

지금 인구의 10분의 1도 안 됐을 작은 도시 베이싱스토크에는 그 당시 여관업을 겸한 술집이 50여곳에 달했다. 주인들은 대부분 양조업자였고, 심지어 시장도 양조업자였다. 한마디로 그 도시의 생명, 도시 경제와 시민의 삶을 떠받친 건 신의 말씀이 아니라 술이었다. 우월감과 확신의 소명의식에 사로잡힌 일부 종교인들이 가끔 벌이는 행태는 위협적이면서도 한편으론 우스꽝스럽지만, 당시 구세군의 금주운동은 무척 공격적이었다고 한다.

참다 못한 베이싱스토크의 술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주먹과 돌이 난무했고, 경찰력으로도 모자라 런던의 기마포병부대가 출동할 정도였다. 양조업자인 시장이 얼마나 폭동 진압에 협조적이었을지 알 순 없지만 경찰 중에는 구세군에게 “망할 놈의 위선자들(damned hypocrites)”이라며 등을 돌린 이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 폭동으로 많은 이들이 다쳤고, 시민 20여명이 기소돼 10명 정도가 구속됐다. 하지만 술집 가운데 문을 닫은 곳은 한 곳도 없었다고 한다.

금주운동의 주력인 ‘불굴의 구세군(The Unconverted Salvation Army)’이 출범한 건 1880년 8월이고, 그에 맞선 ‘타락자들의 군대’인 ‘해골 군단(Skeleton Army)’도 이듬해 초 조직됐다. 바이킹의 해골기를 앞세운 그들의 구호는 ‘3B’ 즉 Beef, Beer, Bacca(담배)였는데, 그건 구세군의 ‘3S’ 즉 소박한 음식(Soup)과 위생(Soap), 구난(Salvation)을 조롱하는 의미였다. 양측은 구세군이 공세적 금주운동을 멈춘 1880년대 말까지 실제로 빈번히 충돌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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