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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호∙정재숙∙성석제… 아직도 뜨거운 기형도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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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호∙정재숙∙성석제… 아직도 뜨거운 기형도를 기억한다

입력
2019.03.07 04:40
수정
2019.03.07 15:12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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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젊음의 상징’이자 단 한 권의 시집, 그것도 유고 시집(‘입 속의 검은 잎’)으로 30년간 회자되는 시인, 기형도(1960~1989). 30주기(7일)를 맞아, <한국일보> 가 지인들에게 그에 대한 기억을 꺼내달라는 부탁과 함께 물었다. 기형도는 왜 여전히 이토록 뜨거운 이름일까. 2019년에 그의 시를 읽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첫 시집 발간을 준비하던 1989년 3월 7일 스물 아홉의 짧은 생을 마치고 세상을 떠난 기형도 시인(왼쪽) 그가 남긴 시들은 ‘유년’과 ‘청춘’의 통과의례가 됐고, 많은 이들이 어느 한 시절 ‘입 속의 검은 잎’을 옆구리에 끼고 걸었다.
첫 시집 발간을 준비하던 1989년 3월 7일 스물 아홉의 짧은 생을 마치고 세상을 떠난 기형도 시인(왼쪽) 그가 남긴 시들은 ‘유년’과 ‘청춘’의 통과의례가 됐고, 많은 이들이 어느 한 시절 ‘입 속의 검은 잎’을 옆구리에 끼고 걸었다.

◇연세문학회 후배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

“시 쓰려고?” 문학 청년을 꿈꾼 연세대학교 1학년 시절, 쭈뼛거리며 연세문학회 사무실을 기웃댄 나를 제일 먼저 반겨준 사람이 기형도 형이었다.

선배들 모두 “네가 무슨 문학이냐”고 비웃을 때도 형만은 내 시가 좋다고 했다. 내 시를 한 구절씩 짚어 가며 “상호는 참 괜찮은 사람이야, 좋은 시인이 될 거야” 응원해 줬다. 내가 지금까지 문학에 대한 고민을 계속 하는 건 형이 건넨 위로 덕분이다.

형은 시를 쓰면 제일 먼저 내 의견을 묻곤 했다. “잘 몰라요, 그런데 좋네요”라고 대답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형은 늘 내 생각을 궁금해 했다. 그때 본 시들이 기형도 시집의 3분의 2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시로 따지면 연세문학회에서 내가 형의 직계다. 형이 직접 그렇게 말해준 적은 없지만.

형은 시에 모든 걸 바쳤다. 부끄럽거나 괴로운 마음을 굳이 숨기지 않고 시에 솔직하게 드러냈다. 사람들이 여전히 형을 추억하고 사랑하는 이유는 아픔과 슬픔을 감추지 않은 그 마음이 애틋하고도 아름다워서일 거다. 형은 비가 오면 학교 써클룸에서 트윈 폴리오의 노래를 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불렀다. 그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형은 시 안에서 늘 괴로워했지만, 따뜻한 사람이었다. 형이 보고 싶을 뿐이다.

◇기자 후배 정재숙 문화재청장

기형도 선배는 늘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1987년 겨울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시 낭송회 현장.

나는 평화신문에, 그는 중앙일보에 몸담고 있을 때였다. 후줄근한 회색 외투에 부스스한 머리, 그 뒤로 비치는 기 선배의 자아는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이제 와 보니 죽음조차도 그의 중얼거림을 닮았다. 예민한 자아, 상실감, 회의주의 같은, 누군가는 비판하지만 많은 이가 사랑하는 투박한 염세 말이다. 그의 창창한 앞날을 기대했던 언론계 동료들은 1989년 그의 부고에 함께 통음했다. 안타까웠다.

그의 시는 통렬한 시대 인식, 나아가 자아 인식에 빠지게 만든다. 1980년대라는 뜨거운 시대를 함께 거쳐온 사람으로서 그의 시를 읽을 때면 ‘젖어 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유를 그리워하던 그 때의 우리와 비틀거렸던 젊은 시절 기억이 소환된다.

3월 초가 되면 기 선배를 떠올린다. 그의 시 ‘물 속의 사막’과 함께.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시를 통해 같이 울고, 위안을 얻고, 결국엔 슬픔에서 빠져 나온다.

◇절친 성석제 소설가

만 스무 살에 만나 스물아홉을 꽉 채우고 갔으니 알고 지낸 세월이 10년 남짓이다. 형도와 함께 한 10년은 반복되는 일상의 연속이라기보다는 긴 여행을 함께 다닌 시간 같다.

형도의 죽음 이후 30년은 형도가 부재한 상태에서의 여행이었지만, 늘 함께 여행을 다닌 느낌이다. 형도가 내 삶과 존재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일 거다.

나는 소모되고, 나이 들고, 닳고, 지치지만, 형도는 영원한 젊음으로 남아있다. 생이 멈췄다는 이유만으로 형도가 젊게 기억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남긴 시와 산문들이 당대 젊은이들에게 강력한 호소력을 갖기 때문에 영원한 젊음의 상징이 됐다. 불안과 절망, 좌절과 희미한 희망. 형도가 포착해 시에 투영한 젊은 세대의 속성은 시대가 바뀐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그의 시가 영원성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형도는 모든 사람이 본인과 가장 친했다고 회고하게 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참 다정다감한 친구였다. 그의 시도 그렇다. 모든 사람이 그의 시를 읽으며 다정한 친구처럼 느껴지게 하는 힘이 있다. 보통의 시인은 쉽게 이르지 못하는 경지다. 윤동주와 김소월이 시대를 불문하고 계속 읽히듯, 훌륭한 시인들의 시는 계속 읽힌다. 형도의 시 역시 그럴 것이다.

왼쪽부터 연세문학회 후배인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 기자 후배인 정재숙 문화재청장, 절친이었던 성석제 소설가와 이광호 문학과지성사 대표
왼쪽부터 연세문학회 후배인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 기자 후배인 정재숙 문화재청장, 절친이었던 성석제 소설가와 이광호 문학과지성사 대표

◇이광호 문학과지성사 대표

문학과지성사에서 일하며 기형도 시인이 남긴 시로 작업할 기회가 많았다. 올해 30주기를 맞아 시 전집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와 트리뷰트 시집 ‘어느 푸른 저녁’을 낸다.

이렇게 책을 만들고 알리는 것이 남은 사람으로서 문학적 우정을 실천하는 길이 아닐까 싶다.

유고 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1989)은 30만부가 판매됐다. 반짝 인기가 만든 숫자가 아닌, 매년 1만 명의 새로운 독자들이 차곡차곡 쌓은 숫자다. 이벤트나 광고를 하지 않았는데도, 세대가 계속 달라지는데도, 10대와 20대가 계속해서 시집을 찾아 읽는다.

‘엄마 걱정’을 비롯해 기 시인의 유년 시절을 다룬 시가 교과서에 실린 것은 청소년 독자가 그의 문학 세계를 만날 기회를 열었다. ‘스물 아홉 살의 요절’이라는 사연이 드리운 청춘의 이미지는 그를 20대에게도 언제나 유효한 이름으로 만들었다. 누구나 인생의 어느 한 순간엔 ‘기형도 감수성’이라는 세계를 통과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기형도를 읽는다는 것은 ‘과거’가 아닌 ‘현재’를 읽는다는 뜻이다. 그의 시는 지금 읽어도 낡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새로운 감수성과 상상력의 원천으로 기능한다. ‘동시대성’은 그가 단 한 권의 시집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다.

◇직속 후배 박해현 조선일보 문학전문기자

1987년 중앙일보 문화부로 발령받아 가니 거기 기형도 선배가 있었다. 삼엄한 시대였다. 5공 치하였고, 6월 항쟁이 있었다. 등단하고 한동안 시를 많이 못 쓰던 선배가 그 해부터 폭발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우리가 아는 ‘그로테스크한 리얼리즘’의 시를 본격적으로 썼다.

회사 편집국에 앉아 있으면 선배가 시를 보여주곤 했다. 당시 선배의 시를 가장 처음 읽은 사람이 아마도 나였을 것이다. 나로서는 선배의 시에 좋다고 하든 나쁘다고 하든 한마디씩 거들어야 했으니, 고역 아닌 고역이었다(웃음). 선배의 시는 울적하고 어두웠지만, 사람은 밝고 명랑했다. 블랙유머를 구사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다. ‘질투는 나의 힘’ 같은 시 제목은 그런 블랙 유머다. 선배는 술은 한 잔도 못했지만 엄청난 골초였다. 편집국에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선배의 시에는 ‘환상’과 ‘환멸’이 공존한다. 절망하고 비판하면서도 앞날에 대한 환상을 저버리지 않는 것은 20대의 속성이다. 선배는 노래를 참 잘했다.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는 ‘젊음이란 무엇인가(What is a youth)’를 참 잘 불렀다. 노래 제목처럼, 선배의 시가 젊음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시로서 오래도록 읽히는 게 아닐까 싶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com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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