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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년… 끈질기다 ‘태극기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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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년… 끈질기다 ‘태극기 집회’

입력
2019.01.05 09:00
수정
2019.01.18 14:05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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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지 2년을 하루 앞둔 지난달 8일, 서울역광장에서 열린 태극기집회에서 참석자들이 박 전 대통령의 탄핵 무효를 주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지 2년을 하루 앞둔 지난달 8일, 서울역광장에서 열린 태극기집회에서 참석자들이 박 전 대통령의 탄핵 무효를 주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의 죽음을 보면서 좌파를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달 15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서울역광장 앞에서 열린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무효 집회 현장. 무대에 오른 조원진 대한애국당 대표가 세월호 참사 유가족 불법 사찰 지시 혐의로 수사를 받다 극단적 선택을 한 이 전 사령관을 언급하자 곳곳에서 “이 전 사령관을 살려내라”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집회 사회자가 “이 전 사령관을 죽음으로 내몬 정치 검찰과 문재인 대통령의 책임을 끝까지 묻고 잘못을 시인하는 날까지 투쟁하자”라고 외치자 더 큰 함성이 이어졌다. 대한애국당과 박근혜대통령1000만석방운동본부(석방운동본부)가 주최한 집회는 이날이 98번째로 5,000여명의 참가자가 서울역광장을 가득 메웠다.

같은 시각,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진행된 ‘태극기혁명 국민대회’ 집회에선 박근혜 정부 초대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윤창중씨가 마이크를 잡았다. 윤씨는 “북한 김정은의 연내 방남(訪南)이 최종 무산됐음을 선언한다”라며 “우리가 태극기집회를 계속 이어왔기 때문에 김정은이 남한 땅을 못 밟은 것이다. 우리가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는 위대한 세력”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태극기시민혁명국민운동본부(국본)가 주최한 이날 집회에는 700여명이 모였다.

◇2년 넘게 계속 되는 태극기집회

박 전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며 석방을 요구하는 보수단체의 태극기집회가 2년 넘게 계속되고 있다. 2016년 11월 19일, 서울역광장 앞에서 ‘박 대통령 하야 반대 집회’라는 이름으로 처음 열린 태극기집회가 이듬해 3월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이후 점차 사그라질 것이라던 예상을 깨고 2년 넘게 매주 토요일, 서울 도심 곳곳에서 열리고 있는 것.

실제 이날 석방운동본부와 국본 외에도 일파만파애국자연합(일파만파), 자유대연합, 박근혜대통령구명총연맹(구명총) 등 단체도 각각 종로구 세종대로 동화면세점, 교보빌딩 앞, 종로1가 보신각 앞에서 집회를 벌였고 22일, 29일에도 어김없이 계속됐다. 촛불집회에 대항하는 ‘맞불집회’로 불렸던 태극기집회가 이제는 촛불집회(2017년 4월 29일 종료)보다 더 질긴 생명력을 이어가며 세를 확장해가는 것이다.

경비 분야 경력만 10년이 넘는 경찰 관계자는 “특정 단체가 2년 넘게 매주 집회를 이어가는 것은 처음 보는, 매우 드문 광경”이라며 “2008년 미국산 쇠고기 반대 집회만 해도 거의 매일 열리긴 했지만 그 기간이 3개월을 넘지 않았다”고 말했다.

태극기집회 5개 단체. 그래픽=강준구 기자
태극기집회 5개 단체. 그래픽=강준구 기자

◇과격→여유, 달라진 노인들

집회 주축은 여전히 노인들이고 공감하기 힘든 허무맹랑하거나 과격한 연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분위기는 2년 전과 사뭇 달랐다. 초반기만 해도 집회를 취재하는 기자 또는 주변을 지나가는 청년들에게 욕설을 내뱉거나 폭행도 서슴지 않던 참가자들은 최근 문 대통령 지지율이 40% 후반대로 하락하고 김 위원장 연내 방남이 무산된 덕분인지 자신감에 찬 모습이다.

2017년 집회 취재 당시, 참가자들과 눈만 마주쳐도 욕을 먹고 팔을 맞거나 다리를 치인 경험이 있던 기자의 눈에, 이날 취재에 성실하게 응하는 참가자들의 모습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한 참가자는 “대한애국당이 대한민국을 유일하게 지켜낼 수 있는 정당이니 기자 양반도 가입하라”고 입당까지 권유했다. 현장에 마련된 회비 모금함은, 집회 초창기 제기된 ‘노인들이 돈을 받고 동원된다’는 의심보다 자발적으로 참여한다는 인상을 받게 했다. 대한문 앞 집회 현장에서 만난 임경선(72)씨는 “돈 받고 나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매주 회비를 내고 있다”라며 “문 대통령이 하는 걸 보니까 북한에 나라를 통째로 바칠 분위기라서 국가와 내 자손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토요일마다 나온다”라고 말했다. 이경수(82)씨도 “박 전 대통령 석방을 촉구하는 성명서에 이름, 전화번호를 적었더니 매주 집회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는 문자가 와서 그걸 보고 오는 것”이라며 “동화면세점이나 교보빌딩 앞에서 하는 집회도 두루 참석한다”고 밝혔다.

굳이 정치적인 얘기를 하기 위해서라기보다 동년배 집단에서 자신의 생각이나 얘기를 공유할 목적으로 광장으로 나온다는 이들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한 집회 참가자는 “전에야 워낙 반대(촛불) 쪽에서 박근혜 정부를 무너뜨리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나서니까 우리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겠다 싶어 팔을 걷어붙이고 나왔던 것”이라며 “지금이야 꼭 정치 문제나 그런 걸 얘기하려고 나오는 분위기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주말을 맞아 운동 삼아 나왔다는 이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그간 안부를 주고 받는 이들 등 집회를 나온 목적과 경위는 저마다 달라 보였다. 경찰 관계자는 “참가자들 면면을 보면 전직 고위 공무원도 있고, 대기업 임원도 있고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이라며 “가끔 과격한 행동이나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은 스트레스를 풀거나 가볍게 바람을 쐬겠다는 마음으로 나온다”고 말했다.

지난해 6월 서울 종로구 교보빌딩 앞에서 열린 '자유민주주의 수호 국민대회'에서 보수단체 회원들이 태극기를 들고 집회에 참가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지난해 6월 서울 종로구 교보빌딩 앞에서 열린 '자유민주주의 수호 국민대회'에서 보수단체 회원들이 태극기를 들고 집회에 참가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집회 참여 촉구하는 유튜브 채널… 진보세력 모방 분석도

극우 인사들의 유튜브는 집회 참석을 촉구하는 촉매제다. 박 전 대통령 탄핵을 전후로 기존 미디어를 불신하게 된 노인들에게 유튜브는 해방구가 됐다. 방송 규제나 심의가 없는 탓에 박 전 대통령을 옹호하거나 문재인 정부를 얼마든지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게 된 것. 이런 흐름과 맞물려 구독자 수도 급증했다.

우파 성향 인터넷신문 ‘독립신문’ 창간자 신혜식씨의 유튜브 채널 ‘신의한수’ 구독자는 3일 기준 45만4,353명으로 30만명대인 지상파 3사의 유튜브 구독자를 훨씬 뛰어넘었다. 정규재 전 한국경제신문 주필이 진행하는 ‘펜앤드마이크 정규재TV’(구독자 34만2,602명)도 마찬가지다. 유튜브를 통해 극우 보수층의 논리를 대변함은 물론 조회수에 비례해 수익도 생기는 구조라 앞으로 우파의 유튜브 채널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실제 이날 현장에 방송사 카메라는 한 대도 없었지만 유튜브 채널로 집회를 생중계하기 위한 휴대폰 5, 6대가 무대 앞에 설치돼 있었고 셀카봉을 높이 들고 집회 장면을 생중계하는 이들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서울역광장에서 만난 이영희(60)씨는 “나는 처음에 촛불을 들었던 사람으로 그때는 대통령이 정신이 나간 줄 알았다. 그러나 (극우 인사의) 유튜브에서 박 전 대통령이 돈 받은 거 없다는 내용의 방송을 보니 생각이 달라졌고, 이제는 박 전 대통령이 무죄라고 외칠 수 있는 집회에 매주 나오고 있다”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이명박ㆍ박근혜 정부 시절 진보세력이 주도한 팟캐스트가 대안언론으로 주목 받은 것과 유사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보수 집권기에 진보성향 인사들이 팟캐스트를 통해 정부와 권력을 강하게 비판했고 이것이 정권을 무너뜨리는 동력이 됐던 것처럼 보수 인사들도 이를 모방, 흡수해 유튜브를 활용한다”(김병민 경희대 행정학과 겸임교수)는 것이다.

1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태극기 집회'에서 대한애국당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석방을 촉구하며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고 있다. 뉴스1
1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태극기 집회'에서 대한애국당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석방을 촉구하며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고 있다. 뉴스1

◇문 대통령 지지율 하락할수록 집회 확장될 것

이날 집회 참석자 가운데는 급속한 남북관계 진전과 최저임금 인상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헌법질서 붕괴를 우려해 나왔다는 이들도 꽤 있었다. 중견기업 부사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김영선(64)씨는 “우리 세대가 어렵게 일궈놓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모두 바치겠다는 것 아니냐, 그것만큼은 눈뜨고 볼 수 없어 힘을 보태기 위해 매주 나오고 있다. 2년 전만 해도 사람이 이렇게 많지 많았는데 매주 늘고 있어서 문 대통령을 우리가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2년 넘게 계속되는 태극기집회의 동력에 대해 “박 전 대통령을 향한 애잔한 마음과 향수만을 가지고 설명하기 힘들다”라며 △집회로 정권 교체를 이뤄낸 진보세력 학습효과 △자유시장경제, 헌법질서 파괴에 대한 위기의식 △문재인 정부 지지율 하락과 맞물린 보수세력의 결집력 등으로 풀이했다.

김형준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는 “진보세력이 촛불집회를 통해 대통령을 탄핵하고 정권을 바꾸는 모습을 보면서 보수세력도 적극적으로 집회를 하면 현재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학습효과, 기대감이 커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라며 “민주주의사회에서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김병민 교수는 “기성, 보수세력은 문재인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에 거침 없이 속도를 내고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등 시장질서를 왜곡해, 자신들이 일궈놓은 대한민국의 헌법질서가 송두리째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갖고 있었다”라며 “그러던 중 문 대통령 지지율이 빠지면서 이 정권을 타도하자는 태극기집회 목소리에 더 힘이 들어가고 결집하는 것으로 문 대통령 지지율이 하락할수록 집회는 더 확장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승임 기자 choni@hankookilbo.com

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손영하 기자 froze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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