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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입력
2018.11.22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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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서리가 하얗게 내렸다. 콩 수확을 하러 밭으로 나갔더니 잎사귀는 다 떨어지고 꼬투리만 매달린 콩대마다 흰 서리가 내려 별처럼 반짝였다. 서리 내린 뒤에 수확한다고 해서 서리태라 부르기도 하고, 작고 동글동글한 모양이 쥐 눈을 닮았다고 해서 쥐눈이콩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콩. 지독한 여름 폭염과 가뭄을 통과한 콩이 과연 잘 여물었나 궁금해 꼬투리 하나를 까보니, 쥐 눈 같은 까만 콩들이 빼곡 차 있다.

나는 콩대를 낫으로 베어 묶어 집으로 가지고 와 마당에 멍석을 깔고 펴 널었다. 볕 좋은 오후가 되자 콩 꼬투리 터지는 소리가 제법 정겨웠다. 탁, 톡, 타닥, 톡....내가 도리깨로 털기 전에 햇볕이 먼저 타작하는 소리. 나는 콩 터지는 소리가 듣기 좋아 멍석 옆에 잠시 앉아 있는데, 부엌에서 김장할 준비를 하느라 마늘을 까던 아내가 나오길래 말을 건넸다. “여보, 요 소리 좀 들어보구려.” “무슨 소리를요?” “흐흐, 콩 꼬투리 터지는 소리가 사랑의 빅뱅으로 들리는구먼.” 아내가 키득키득 웃으며 대꾸한다. “에구 참, 누가 시인 아니랄까봐!”

나는 요런 콩 꼬투리 터지는 소리를 늦가을 들판으로 산책을 나가 걸을 때마다 자주 듣곤 했다. 농로 주변에 흔한 돌콩이나 야생 동부콩, 콩과식물인 차풀, 봉숭아 씨앗 등이 터질 때 나는 소리도 비슷했다. 나는 그렇게 열매를 품은 꼬투리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우주생명이 출현하는 빅뱅을 연상했고, 그 소리를 사랑의 빅뱅이라 명명했다. 물론 그 소리는 귀 기울여 들어야만 들리는 미세한 소리다. 마치 주부들이 쌀을 물에 담가 불릴 때 나는 쌀 붇는 소리처럼.

내가 이런 사물의 미세한 움직임에 감각의 눈을 뜬 건 20대 때였다. 시인 지망생이었던 나는 시적 감흥을 주는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 한동안 매혹되었는데, 주인공 조르바는 어느 날 작중 화자와 함께 바다를 바라보다가 시흥에 젖어 읊조린다.

“보스, 저기 저 건너에 파란 색깔, 가슴이 뭉클거리는 저 기적이 뭔가요? 당신은 저 기적을 뭐라고 부릅니까? 바다라고 하나요? 초록빛 꽃으로 된 앞치마를 입고 있는 저건요? 대지라고 부릅니까? 이걸 만든 예술가는 누구지요? 보스, 맹세코 나는 이런 아름다운 광경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나는 이런 조르바의 시인과 같은 시선을 부러워했고, 그런 눈으로 사물과 세상을 보려는 갈망에 사로잡혔다. 작가가 말년에 쓴 ‘영혼의 자서전’에서 언급하듯이 “마치 모든 것을 처음 보듯 대기와 바다와 불과 여인과 빵이라는 영구한 일상적 요소에 처녀성을 부여하며 아침마다 새로워지는 창조적 단순성”을 지닌 삶을 살고 싶어 했다.

우리가 이렇게 살고 싶다면 우리가 만나는 사소한 일상에서도 감동할 줄 알아야 한다. 콩 한 알, 풀꽃 한 송이, 서산에 물드는 저녁놀을 처음 대면한 듯 놀라워하고 그 아름다움에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시를 쓰든 쓰지 않든 시인이다. 그래서 나는 이름과 전화번호가 있는 내 명함 뒷면에 이런 문장을 박아두었다. “놀람과 그리움을 직업으로 하는 제게 당신의 놀람을 선물해 주십시오.”

그렇다. 나는 나에게 놀람과 감동을 선물해주는 사람과 인생길을 걷고 싶다. 그것이 내 삶을 신바람 나게 하고, 내 영혼을 젊게 살도록 추동하는 에너지원이 되기 때문이다. 숫자가 가리키는 늙음이야 어쩌겠는가. 다만 나는 육신의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영혼의 젊음을 누리고 싶을 뿐이다. 나는 낯선 사람들을 만나면 되도록 나이가 몇인지 묻지 않는다. 당신의 삶의 시간 속에 어떤 놀람과 감동이 있었는지 물을 뿐이다. 그것이 시인으로 살아가는 나를 살리는 큰 힘이 되기 때문이다.

고진하 목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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