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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한마디... 절도범 삶의 전환점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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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한마디... 절도범 삶의 전환점 됐죠”

입력
2018.10.02 04:4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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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8일 서대문경찰서를 찾은 김모(59)씨. 5년 전 그의 손목엔 수갑이 채워져 있었지만, 이날만큼은 자신의 인생을 바꿔준 은인을 찾겠다는 설렘으로 가득했다.
지난달 18일 서대문경찰서를 찾은 김모(59)씨. 5년 전 그의 손목엔 수갑이 채워져 있었지만, 이날만큼은 자신의 인생을 바꿔준 은인을 찾겠다는 설렘으로 가득했다.

처음에는 그저 취미였다. 지인들과 재미로 시작한 고스톱은 경마로, 경륜으로 점점 더 판을 키워갔고 커진 판만큼 빚도 늘었다. 집을 담보로 은행에 돈을 빌리고 사채까지 당겨 쓰자 아내와 아이들은 결국 곁을 떠났다. 가족이 떠난 자리에는 어느새 ‘수천만 원’에 달하는 빚만 남았다. 평범한 가장이자, 친절한 택시기사던 김모(59)씨가 상습절도범이 되는 데는 그리 거창한 이유가 필요치 않았다.

“넘어서는 안 될 선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술 취한 승객을 태울 때마다 ‘이번 딱 한번만’이라는 마음의 소리가 저를 유혹했습니다.” 만취해 제정신이 아닌 승객들에게 카드 비밀번호를 캐물으면 종종 대답이 돌아왔다. 인근 현금입출금기(ATM)에서 돈을 빼는 방식으로 승객의 지갑을 털었다. 그렇게 ‘딱 한번만’ 다짐하며 저지른 범죄가 무려 15번, 훔친 금액은 5,000만원에 달했다.

2003년부터 2013년까지 10년간 이어지던 범죄는 승객의 신고로 막을 내렸다. 서울 서대문경찰서에 붙잡힐 때까지만 해도 신고한 피해자 한 명과 합의해 무마하고 이전 사건들은 숨길 심산이었다. 그런데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다, 수사를 담당한 서대문서 형사3팀 경찰과 마주앉은 순간부터. “범죄자잖아요. 그런 저에게도 존칭을 써주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줬어요. 식사를 거르지는 않았는지 계속 물어주고요. 나 같은 사람도 존중을 받는구나, 그런 생각이 드니까 갑자기 모든 걸 다 내려놓고 깨끗하게 다시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마음을 돌린 김씨는 죽을 때까지 묻어두려던 나머지 14건의 여죄도 스스로 털어놨다. 피해 1건, 피해금액 300만원으로 끝날 사건은 김씨의 자백으로 피해 15건 피해금액 5,000만원으로 범죄사실이 늘었고, 결국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특수절도 혐의로 징역 2년이 선고됐다.

삽화 송정근기자
삽화 송정근기자

짧은 연이지만 김씨는 교도소에서 명절 때마다 형사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형사3팀장은 ‘건강하게 출소해 식사 한번 하자’는 답장을 보내왔고, 형사반장은 교도소로 직접 면회 와 영치금 5만원을 넣어주기도 했다. 누군가 자신의 회복을 믿어주고 존중하고 응원한다는 것, 경찰의 작지만 변치 않는 호의는 김씨에게 희망 그 자체였다. 물질보다 귀한 사회적 지지는 그렇게 갱생의 기초근육이 되어주었다.

김씨는 출소 이후 말 그대로 ‘개과천선’했다. 꾸준한 상담을 통해 도박을 완전히 끊고, 3년간 일용직 노동과 트럭 운전을 통해 6,000만원에 달했던 도박 빚도 모두 갚았다. 요즘에는 다시 합친 아내와 함께 주말마다 자원봉사를 나간다. 꾸준한 운동으로 올해 처음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기도 했다. 도박중독의 회복 과정에서 ‘재건단계’에 속하는 △채무상환 △돈 관리 계획 △새로운 분야에 대한 관심 △가족과의 관계 개선 △자신감 회복의 모든 항목을 달성한, 사실상의 단(斷)도박을 이뤄낸 것이다.

삶에 자신과 여유가 붙은 김씨는 은인들을 찾기 위해 출소 3년3개월 만인 지난달 18일 서대문경찰서를 찾았다. 그러나 ‘당시 팀장과 팀원은 모두 다른 곳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답변만이 돌아왔다. 혹시 누가 될까 봐 굳이 캐묻지 않았다. ”사느라 바빠서,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덕분에 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언젠가 다시 한 번 만나게 되면 정말 고맙다고 고백하고, 꼭 한 번 안아주고 싶습니다.” 김씨는 지금도 ‘그때 그’ 경찰관을 찾고 있다.

이승엽 기자 s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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