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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속으로]재일동포 3세 시민·인권운동가 신숙옥씨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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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속으로]재일동포 3세 시민·인권운동가 신숙옥씨의 삶

입력
2003.05.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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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11 테러사건 이후 일본에서도 공항 등지의 보안체제가 대폭 강화됐습니다. 수하물 검사 때 탑승권을 받아 든 젊은 공항직원이 전에 없던 요구를 했습니다. '이름을 읽어 보시죠.' '거기 씌어있지 않느냐'고 해도 직원은 고장 난 테이프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습니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어요. 한참 뒤에야 '발음으로 외국인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식의 보안조치가 이듬해 4월까지 계속됐습니다."신숙옥(辛淑玉·44)씨 집안은 3대째 일본에서 살고, 그 자신은 도쿄(東京)가 고향이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일본인에서 잠재적 범죄인인 '수상한 외국인'이다. (서양인은 예외다. 그들의 유난한 백인 컴플렉스 때문일 것이다) 일본에서 뿐이랴. 한국에서도 그는 외국인이다. 어느 곳에도 착근(着根)하지 못한 경계인(境界人), 그게 신씨와 같은 재일조선인의 삶이다.

80년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조선인 수천 명이 일본 군중의 광기(狂氣)에 무참하게 희생된 1923년 '관동(關東)대지진' 때다. 그 때도 조선인을 골라내는 주요한 방식이 발음이었다. "'10엔 50전'이라고 말해봐!" ('주엔 고주센'의 '주'는 영어의 'z'와 비슷한 유성음이어서 조선인에게는 익숙치 않은 발음이다) 기막힌 역사의 반복이다.

신숙옥씨는 현재 일본에서 알만한 유명인이다. 우선 그는 성공한 기업인이다. 신씨가 대표인 (주)고카샤(香科舍)와 인재육성기술연구소는 기업경영컨설팅과 직원연수 및 채용 대행업체로는 일본에서 톱 클래스다. 고교 중퇴 학력인 그가 메이지(明治)대 정치경제학부 초빙교수를 맡고있는 것도 이 분야에서의 탁월한 식견과 경험을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명성은 대부분 전방위에 걸친 치열한 시민·인권운동으로 얻어진 것이다. 그는 현재 '이시하라(石原) 도쿄도지사 퇴진 네트워크' 대표를 맡고 있으면서 '가나가와(神奈川)현 인권계발추진회의'와 '일본교직원조합 21세기 커리큘럼위원회', '생활도시 도쿄를 연구하는 모임' 등 온갖 단체를 주도하는 현장활동가다. 그런가 하면 재일조선인과 여성문제 등을 다룬 책을 8권이나 출간한 다작(多作) 저술가이자, 매스컴에 단골로 초청되는 시사평론가이기도 하다.

일본인들의 뇌리에 박힌 그의 이미지는 대체로 NHK 등의 TV토론에서 특유의 날카로운 톤으로 일본 우익논객 등에 대해 공격적인 주장을 펼치는 '투사'의 모습이다. (물론 그의 주장이 재일동포를 포함한 사회적 마이너리티를 대변하는 것인 만큼 대부분 시청자에게 편하게 받아들여질 리는 없을 것이다) 지난 주 시민단체 KIN(지구촌동포청년시민연대)의 초청으로 서울에 왔을 때도 그는 예의 격정적인 어투로 재일조선인들의 현실을 소개하고 각별한 관심과 이해를 당부했다.

사실 그가 잠깐씩 눈빛을 눅이고 활짝 웃을 때는 영락없이 장난기 많은 소녀가 된다. 더구나 그는 한때 패션모델(그가 가장 밝히기 꺼리는 이력이지만)을 했을 만큼 눈에 띄는 용모를 갖고 있다. 평생을 겪어온 정체성에 대한 위협과 그에 맞선 '생존'의 몸부림이 그를 드센 여성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신씨는 일본 속에서의 자신을 분명히 인식하게 된 게 너덧 살 때부터였다고 했다. "아버지는 대학을 나오고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버젓한 직장을 구하지 못해 인쇄공을 하며 어렵게 4남매를 부양했습니다. 딸을 유치원에 보낼 처지가 아니었지만 혼자 놀기가 심심해서 떼를 써 승낙을 받아냈지요. 아버지를 따라 유치원에 가니 동네친구들이 반기며 야단이었습니다. 친구들과 한참 신나게 놀고 있는데 아버지가 굳은 표정으로 원장실에서 나오시더니 '집에 가자'며 손목을 잡아 끌었습니다. 그 때 깨달았습니다. '아, 나는 일본사람과 같기를 바라서는 안되겠구나'."

이후 신씨의 성장과정은 그야말로 끔찍한 기억으로 가득 차 있다. 소학교(우리의 초등학교) 입학 전 지능테스트에서 일본아이들보다 높은 그의 점수에 불쾌해진 학부모들이 재시험을 요구하면서 시작된 학창시절은 온갖 상처를 입은 끝에 결국 고교 1학년으로 끝났다. 이지메는 학생들 뿐이 아니었다. 교사들도 책을 빌리러 온 그에게 "너는 더러우니까 만지지마"라는 따위의 말로 그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한번은 전통지역축제인 '마츠리'에 참여하고 싶어하는 내게 어머니가 당시 형편으로는 큰돈을 주고 전통의상 유카타를 사주셨지요. 그런데 축제행렬에 들어서려는 데 누군가 '너는 저쪽(조선인) 아니냐'고 내치더군요. 순간 주변에서 사람들이 썰물처럼 사라졌어요. 결국 터벅터벅 돌아올 수 밖에 없었지요. 그날 어머니는 참 많이 우셨습니다."

아버지의 권유로 중간에 몇 년 다녔던 조총련계 학교에서도 신씨는 역시 이방인이었다. 일본인 학교를 다녔다는 이유로 수 없는 따돌림과 린치를 당했다. 함께 다니던 3살 아래 남동생은 종파주의자로 몰려 교사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한 끝에 가출한 뒤 야쿠자 세계로 들어가고 말았다.

학교를 그만둔 뒤 신씨는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어떤 일들이었느냐"는 물음에 그는 "신문·야쿠르트 배달, 건물 청소원, 접시닦이, 쓰레기 수거, 웨이트리스, 심야다방 DJ…"로 한참 주워섬기다 "당신이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일, 다만 호스테스만 빼고"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다 18살 때인 77년 광고대행사 '하쿠호도"에 입사하면서 처음 직장다운 직장을 잡았다. 이 때 쌓은 경험과 노하우가 8년 뒤 (주)고카샤를 설립해 독립하는 기반이 됐다. 그러나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겪어야 하는 시련은 여전한 일상이었다. 한국이름이 적힌 명함을 면전에 집어던진 기업체 대표,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닌 조선인 여자에게 교육 받을 수 없다"며 집단 퇴장해버린 기업 연수생들…. 그럴 때마다 신씨는 "일본인보다 2배, 남성보다 2배, 합해서 4배를 더 일하겠다"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마침내 90년대 들어 매스컴 등을 통해 성공한 여성기업인으로 공인을 받기에 이르렀다. 2년 전에는 자원봉사에서 만난 일본인 남성과 결혼을 해 뒤늦은 가정도 꾸렸다. (신씨는 자신을 적대시하는 사람들이 많아 신변이 불안하던 차에 남편이 가라데 고단자라는 것도 선택 이유가 됐다고 농담했다)

― 지금은 오히려 한국문화에 일본인들이 열광하는 등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양국 위상이 예전과 비교가 안될 만큼 바뀌었는데도 차별이 마찬가집니까?

"일본인이 볼 때 한국, 한국인과 재일조선인은 명백히 다릅니다.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선 그렇지만 일본 내 조선인에 대한 인식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한국이나 북한 등과 미묘한 문제가 생기면 반드시라고 할만큼 재일조선인에게 화살이 돌아가지요."

짐작했겠지만 신씨는 '재일동포' 대신 '재일조선인'이라는 용어를 고집한다. 그건 남·북 어디에 가깝느냐는 낡은 구분방식이 아니다. 그들의 뿌리와 식민시대 이래 일본인들의 변치않는 시각을 함께 드러내는, 말하자면 역사적 관점이 포함된 용어다.

그가 규정하는 자신의 정확한 정체성은 그래서 한참 길다. '민족적으로 조선반도에 뿌리를 두고있는 일본 내 소수민족으로서의 조선민족으로, 국적은 한국. 일본 영주자격을 갖고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는 재일조선인 3세.'

인터뷰할 때 동조를 표시하며 정서적 유대감을 보이는 것은 더 많은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신숙옥씨의 열변을 들으면서는 흔쾌히 맞장구를 치지 못했다. 수긍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마음 한 구석이 켕겼던 때문이었다. 그가 고발하는 일본인, 일본사회의 편협함과 집단적 폭력성이 우리의 지금 모습과 너무도 닮았던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라. 소수의 약자라는 같은 이유로 우리에게 같은 폭력을 당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외국인노동자, 조선족, 탈북자 ….

신씨는 마지막으로 한국정부의 책임도 물었다. "역대 대통령들은 재일조선인들에게 '자랑스런 한국인' 따위의 공허한 치사만 해댔을 뿐 우리의 힘든 처지를 수수방관했습니다. 우리를 투자재원으로만 보고 바보취급한 거지요. 이제라도 사과해야 합니다." 역시 뭐라 대꾸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었다.

/편집위원 junlee@hk.co.kr

● 그가 꼽은 몇가지 재일조선인 차별 사례

재작년 사무실에서 9·11 테러장면을 TV로 지켜보는 순간 떠오른 것은 극도의 공포였다. '여기에 만약 북한이 조금이라도 관련됐다면….' 집의 어머니에게 곧바로 전화해 "문을 잠그고 밖에 나가지 말라. 창문도 닫고 커튼을 치라. 불을 끄고 전화도 받지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한시간쯤 뒤 이슬람 과격파의 소행이라는 보도가 나오고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역사교과서 왜곡문제가 불거진 같은 해 7월 히로시마(廣島)에서 아침 등교길의 15살조선인 여학생이 일본인 남자에게 납치됐다. 테이프로 눈과 입이 가려진 채 승용차 트렁크에 처박혀 있다 20여분 뒤 길거리에 내팽개쳐졌다. 이 직후 오히려 조선학교 측에서 보도중지를 언론에 요청했다. 비슷한 범행이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지난해 북일정상회담 직후 오사카(大阪)에서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들의 축구시합이 있었다. 조선학생 측의 승리가 굳어지자 일본학생 응원단에서 돌연 "납치! 납치! 납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운동장은 순식간에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다. 당시 일본전국의 많은 재일조선인들이 "무서워서 두문불출하고 있다"고 내게 호소해 왔다.

일본학교에 아이를 보내고 있는 내 친구는 매일 아침 "혹시 이게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많은 일본인들은 지나친 망상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과거의 무서운 상처들이 치유되지 않은 채 쌓여 나타난 '심리적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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