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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에 희망을 주는 사회

입력
2024.04.11 00: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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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2001년 4월 18일 덴마크 출신의 하버드 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오게 쇠렌센(Aage Sørensen)은 자택 근처 얼음판에서 넘어진 사고의 후유증 때문에 사망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2004년 국제적인 명성을 갖는 동료 연구자들은 불평등 연구에서 눈부신 업적을 쌓은 그의 성과를 기리는 책을 그에게 바쳤다. 동료 연구자들은 이 책에서 불평등 연구의 핵심적인 개념들과 연구방법은 쇠렌센의 이론적·방법론적 기여에 크게 빚지고 있다고 썼다.

쇠렌센이 사용한 독창적인 개념들은 여러 개지만 구조로서의 '개방적 지위-사회'와 '폐쇄적 지위-사회'는 잘 알려져 있다. 개방적 지위-사회란 개인의 숙련, 능력, 노력이 사회경제적 보상으로 충분히 발현되는 사회이고, 폐쇄적 지위-사회란 개인이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데 제약이 있는 사회이다. 이 두 개의 구조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이 보상으로 표현되는 방식을 아주 다르게 조직한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개방사회일까, 폐쇄사회일까? 그 둘을 구분하는 다양한 지표가 있지만 여기서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율만을 들어보기로 하자.

필자는 불평등 현상은 특정 시점이 아니라 생애에 걸쳐서 관찰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쇠렌센의 연구 방법대로 2015년에 비정규직이었던 노동자의 이후 7년 동안의 커리어 경로를 분석하였다. 연령은 18~60세로 한정하였고, 5개연도 이상의 관찰 기록을 보여준 노동자들만을 표본으로 선택했다. 연구대상이 된 노동자의 수는 1,097명이다. 비정규직은 기간제, 시간제, 파견·용역·특고·일용직으로 구분했다.

분석 결과 비정규직의 대표적인 이행경로 유형 다섯 개가 산출되었다. 첫째는 기간제를 가교로 하여 정규직으로 이행하는 경로이다. 남부 유럽과 프랑스를 제외하면 유럽에서는 이 유형이 다수이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에서는 평균적으로 불과 2, 3년이면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우리의 연구에서 7년의 긴 기간을 고려하였지만 한국에서 이 유형은 전체의 19.8%에 불과하다.

두 번째는 2015~2022년까지 시종일관 기간제인 경우이다. 28.2%에 이른다. 세 번째는 기간제로 시작하였다가 비경제활동인구로 끝나는 경우인데, 16.3%에 이른다. 네 번째는 시간제로 시작하였다가 2022년에도 시간제인 경우이다. 11.8%이다. 다섯 번째는 파견·용역·특고·일용직으로 시작하였다가 2022년에도 파견·용역·특고·일용직인 경우이다. 23.8%이다.

위의 분석결과는 한국 사회에서는 비정규직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할 경우, 아무리 능력이 있고 노력을 하더라도 장기간 비정규직의 지위를 유지할 확률이 높은 사회라는 것을 보여준다.

유럽의 다른 사회와는 달리 한국 사회가 그런 특성을 가진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노동시장제도와 노동시장정책이 그런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치의 과제는 이 이중구조를 유지하게 하는 노동시장제도와 노동시장정책을 개혁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노동의 문제는 총선에서 거의 이슈가 되지 않았다. 주 4.5일제처럼 노동법이 보호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제외될 의제만이 이번 총선에서 제기되었다. 비정규직과 같은 취약집단의 이해는 체계적으로 정치의 영역에서 배제되었다. 과연 한국 사회는 비정규직 또는 저임금노동자에게 희망을 주고 있는가?


정승국 고려대 노동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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