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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아깝지 않았던 서툰 연극 공연

입력
2024.03.07 22:00
수정
2024.03.08 11:19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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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빈센트 반 카오스 포스터. 더울림포스 제공

연극 빈센트 반 카오스 포스터. 더울림포스 제공

지난주에 본 연극은 특별했다. 수준이 높거나 작품성이 좋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여서 그랬다. 사연인즉슨 이렇다. 스무 살 무렵 모여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만들고 부르던 나의 대학 시절 동아리 '뚜라미'에서 무모하게도 20대에 동기들끼리 결혼한 선배 커플이 있었다. 그들이 낳은 아들이 연극영화과에 들어갔다고 하더니 어느새 정식 연극무대에 선다는 연락이 왔다. 어렸을 때부터 춤추고 노래하는 걸 지켜봤던 꼬마가 어른이 되어 연기를 생업으로 삼겠다고 하니 이 아니 기특할쏘냐,는 아니고 일단 '유사 삼촌'으로서의 의무감 때문에 아내와 연극을 보러 갔다.

연극은 평생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 못했던 비운의 천재 화가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 그리고 고흐의 연인 라셸의 관계를 조금 다르게 설정하고 나름 반전까지 마련한 창작극이었다. 하지만 극본, 연출, 배우 모두 20대 청춘들이 맡은 것이라 극은 어설프고 반전도 정교하지 않았다. 압생트라는 술에 중독된 상태라고는 하지만 고흐가 지나치게 수다스러웠던 점도 마음에 안 들었고 그의 예술적 동반자였다가 나중에 결별한 고갱도 너무나 젊고 충동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열광했고 극이 끝났을 땐 기성 극단 공연 못지않게 환호하는 분위기였다. 관객 대부분이 배우나 스태프들의 가족·친구였기 때문일 것이다.

솔직히 훌륭한 연극은 아니었지만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이 연극의 푯값은 1인당 3만 원이다. 영화 관람권 1만8,000원이 아까워 극장에도 못 간다는 이 시국에 이 금액이면 조금 더 보태서 일급 배우들이 나오는 연극을 볼 수도 있다. 관극회원 할인이나 지인 할인 등을 통하면 같은 가격으로 볼 수 있는 양질의 작품들도 대학로에 많다. 하지만 이 연극엔 기성 연극에 없는 '가능성'과 '성원하는 마음'이 있다. 좀 서툴고 덜 영글었더라도 "얘들은 아직 별로야"라고 넘겨버리기엔 너무 파릇파릇한 싹이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모든 가치의 척도처럼 굳어진 '각자도생' 시대에 사람들은 말한다. 열심히 하는 건 소용없고 잘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지만 정말 그럴까. 물론 프로들은 잘해야 한다. 하지만 이제 시작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하는 자세도 중요하다. 그러면서 발전하기 때문이다. 배우 황정민은 고등학교 3학년 때 학력고사에 응시하는 대신 청소년 극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겨우 스무 살 안짝이고 동료들도 모두 집에는 '독서실에 간다' 거짓말하고 나와 연습을 하며 공연을 올렸다니 그 수준이 얼마나 한심했겠는가. 하지만 알다시피 황정민은 지금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 중 하나다. 그때 너는 미쳤어, 더 공부하고 준비해서 나중에 제대로 해,라고 어른의 목소리로 꾸짖기만 했다면 오늘날의 황정민이 존재했을까.

연극이 끝나고 나서 만난 선배들의 아들은 "아, 왜 하필 오늘 오셨어요? 제일 못한 날이었는데"라며 엄살을 부렸고. 다른 날은 더 잘했냐는 질문엔 "그럼요. 백 배 더 잘했지!"라고 허세를 부렸다. 이 친구가 나중에 어떤 배우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나중에 김무정이라는 배우 이름을 유명한 영화나 연극에서 발견하게 되면 "아, 그때 한국일보 칼럼에 나왔던 친구가 바로 이놈이었네" 하고 반가워해 주시길 바란다. 누구나 무명이었고 누구에게나 가능성은 있다. 우리가 할 일은 현장에 가서 그들을 지켜봐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편성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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