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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과 다음 소희

입력
2024.03.05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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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영화 '다음 소희'의 한 장면. 주인공 소희는 통신 대기업의 하청 콜센터에 파견된 현장실습생으로,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에 고통받다 2017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홍수연양을 모델로 한 인물이다.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

영화 '다음 소희'의 한 장면. 주인공 소희는 통신 대기업의 하청 콜센터에 파견된 현장실습생으로,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에 고통받다 2017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홍수연양을 모델로 한 인물이다.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

영화 '다음 소희'는 전북 전주의 한 콜센터에서 2014년과 2017년 각각 상담팀장과 현장실습생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건을 극화한 작품이다. 영화는 한 통신 대기업의 하청 콜센터에서 상담 노동자들이 원청의 실적 압박과 저임금, 진상 고객들의 폭언에 무방비로 노출된 현실을 고스란히 담았다. 정주리 감독은 영화 제목을 '다음 소희'로 지은 이유에 대해 "소희 역시 누군가(콜센터 노동자)의 다음이면서, 소희 다음으로 올 누군가를 걱정해서다"라고 말했다.

정 감독의 말처럼, 소희의 자리를 채운 다음 누군가는 오늘도 콜센터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견뎌내고 있다. 그런데 최근 상담 노동자들 앞에 실적 압박이나 저임금, 감정 노동이 아닌 새로운 '빌런'(악역)이 등장했다. 바로 인공지능(AI)이다. 실제 AI는 은행·보험사 등 여러 기업들의 콜센터에서 알게 모르게 존재감을 키워가고 있었다. 상담 노동자들은 여성의 날을 앞둔 지난해 3월 8일 기자회견을 열어 "AI가 상담사의 음성을 잘못 인식하면 상담 평가에서 점수를 깎거나, 상담사의 상담 노하우를 수집해 AI를 개선시키기도 한다"고 고발했다. 본보 기획 'AI 시대, 노동의 지각변동'을 통해 만난 상담원도 "내 자리를 대체할지도 모르는 AI의 오류를 수정하는 작업에 직접 참여했다"고 증언했다.

지난달 14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KB국민은행 신관 앞에서 열린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콜센터지부의 '국민은행 콜센터 상담사 정규직 전환 촉구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14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KB국민은행 신관 앞에서 열린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콜센터지부의 '국민은행 콜센터 상담사 정규직 전환 촉구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얼마 안 가 AI는 급기야 상담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KB국민은행은 지난해 11월 "AI 서비스 고도화로 인해 콜수가 20%가량 줄었다"면서 콜센터 하청업체 2곳과 용역계약을 해지했다. 상담 노동자 240명이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했으나, 여론이 악화되자 국민은행과 계약을 유지한 하청업체들이 이들의 고용을 승계했다. 하마터면 AI로 인해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대거 해고되는 '최초 사례'가 될 뻔했다.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AI가 노동자들을 평가하고 채용·승진·성과급 지급 등 인사 전반에까지 관여하는 것, 나아가 사람을 대체하고 누군가의 해고를 앞당기는 것이 과연 용인되어도 괜찮은 일인 걸까. 흔히 '블랙박스'에 비유되는 AI는 스스로 학습하고 결론을 내리기 때문에, 누군가를 저평가하거나 해고해도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알기 어렵다. 인간을 모방한 인지 능력을 기반으로 어느 계층의 어떤 직업을 가진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칠지도 미지수다. 이런 일들이 상담 노동자들에게만 벌어질지, 아니면 더 많은 노동자들이 광범위하게 AI에 의해 대체될 위험에 노출될지 지금으로선 누구도 확언하지 못한다. 늘 그렇듯 문명의 이기가 확산될 때, 불안정한 지위의 저임금 노동자들이 먼저 희생됐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만 알 뿐이다.

이 때문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해 '고용전망' 보고서에서 'AI의 확산'에 대비해 노동자들도 방어막을 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보고서에는 '조직 내 AI 관련 의사결정에 노동자와 노동자 대표가 더 많은 참여를 하거나, 개인정보 등 기본권 보호를 위한 단체교섭을 요구해야 한다' 등의 제언이 구체적으로 담겼다. 그러나 씁쓸하게도 하청업체 계약직 근로자인 '다음 소희'들에게 이런 말들은 꿈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이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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