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닥터 프리즈너’서 ‘악’으로 정의 실현한 교도관 의사 “착하기만한 주인공 답답하잖아요”
데뷔 초엔 연기 지적 ‘욕받이’… 캠코더로 촬영장 찍고 ‘연기노트’ 쓰며 버틴 20년
KBS2 드라마 ‘닥터 프리즈너’에서 검정색 의상만 입고 나와 서늘함을 줬던 배우 남궁민은 지난 20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진행한 인터뷰 자리엔 분홍색 셔츠에 흰색 바지를 입고 나와 반전을 줬다. 그는 “어제 고민해 고른 의상”이라고 농담했다. 935엔터테인먼트 제공

“자기 손에 피 안 묻히고 이길 수 있는 싸움 있을까요?” 최근 종방한 KBS2 드라마 ‘닥터 프리즈너’에서 의사 나이제 역을 맡은 배우 남궁민(41)은 기존 영웅과 정반대의 방식으로 부조리에 맞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나이제는 선이 아닌 악으로 정의를 쫓는다. 재벌가의 농간으로 어머니를 잃은 그는 복수를 위해 교도소까지 들어간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는 감옥의 범죄자들과 손잡고 부당한 방법으로 재벌가와 결탁한 부패 세력을 사지로 몬다.

악으로 악을 응징하는 주인공의 독기 어린 행보에 시청자들은 뜨겁게 반응했다. ‘닥터 프리즈너’는 지난 15일 시청률 15.8%(닐슨코리아 기준)로 막을 내렸다. ‘드라마 시청률 가뭄’에 허덕이는 지상파 방송사의 현실을 감안하면 높은 성적이다. 개인의 복수를 통해 소시민에게 권력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줘 공감을 산 결과다. 지난 20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남궁민은 “착하기만 하고 용서로 일관하는 주인공을 보면 이젠 다들 답답하다고 여기는 시대”라며 “현실에서 겪은 모순에 부글부글 끓고 행동하는 모습에 시청자들이 감정을 이입한 것 같다”고 말했다.

드라마 ‘김과장’(2017)에서 대기업의 횡포에 맞선 직원을 연기한 남궁민은 ‘닥터 프리즈너’로 세상의 ‘갑질’에 저항하는 ‘을’의 대명사 같은 배우로 자리잡았다. ‘닥터 프리즈너’에서 남궁민의 말과 행동엔 날이 잔뜩 서 있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2001)에서 교복을 입고 선한 학생을 연기했던 그의 데뷔 당시 연기를 고려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반전이다. 남궁민은 “데뷔 때는 작품 출연 미팅을 하러 가면 대놓고 ‘저렇게 유약하게 생긴 애가 남자다운 역을 할 수 있겠어’란 소리를 들었다”며 웃었다. 그의 곱상한 외모에 대한 선입견이었다.

KBS2 드라마 '닥터 프리즈너'에서 남궁민은 독기 어른 의사로 나온다. 지담 제공

신인 시절 남궁민은 ‘욕받이’었다. 그는 “옛날엔 욕을 하는 감독들이 많았다”며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 등 사람들 다 있는데 연기 지적을 받으며 욕을 듣고 살았다”고 말했다. 워낙 긴장한 탓에 차에서 대기할 때도 등을 의자에 제대로 기대지도 못했다고 한다.

힘든 환경에서도 남궁민은 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채찍질했다. 그는 신인 때부터 캠코더로 촬영 모습을 따로 찍어 현장에서 연기를 모니터링하고 있다. 남궁민의 대본은 ‘논문’ 같기로 유명하다. 그의 대본은 대사에 대한 생각을 비롯해 발음 톤 등을 적어 놓는 문구로 늘 빼곡하다. 남궁민은 “‘닥터 프리즈너’ 첫 장면 촬영을 위해 대본에 나온 장면만 석 달을 보며 고민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7월 1회 대본을 처음 받은 후 휴대폰에 저장해 둔 ‘나이제 연기 노트’ 메모만 100개가 넘는다. 남궁민은 “하면 할수록 부족함을 느끼는 게 내 연기의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이를 악물고 쏟은 노력과 뚝심은 결국 통했다. 그에게 2015년에 ‘순정남’에 갇혔던 틀을 깰 기회가 왔다. 남궁민은 드라마 ‘냄새를 보는 소녀’에서 사이코패스 살인마 역을 능숙하게 연기했고, 이후 광기 어린 재벌 후계자(‘리멤버: 아들의 전쟁’ㆍ2015) 등 그가 예전엔 해보지 못한 다양한 배역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남궁민은 “요즘엔 사람들이 ‘남궁민 무섭다’는 말을 더 많이 한다”며 웃었다.

남궁민은 1999년 EBS 드라마 ‘네 꿈을 펼쳐라’로 데뷔했다. 올해로 연기 생활 만 20년을 맞았다. 배우로서 큰 위기는 2010년대 초반이었다. 드라마 ‘내 마음이 들리니’(2011)를 찍은 뒤 2년 동안 이렇다 할 작품에 출연하지 못했다. 남궁민은 “주인공을 하고 싶어 작품을 고사하다 보니 결국 쉬게 되더라”며 “고민하다 ‘구암허준’(2013)으로 사극에 처음 도전하면서 다시 연기에 대한 열정을 찾았다”고 옛 얘기를 들려줬다.

배우로서 ‘거품’을 뺀 그는 연기 활동에 부쩍 안정을 찾은 눈치였다. 남궁민은 “아직 ‘인생 캐릭터’를 만나지 못했다”며 또 다른 변신을 바랐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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