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 한국일보]지평선-박구원 기자

태국의 유명 관광지 푸켓 섬 주변에는 카오 핑 칸이라는 작은 섬이 있다. 두꺼운 기둥처럼 바다 위로 솟구친 모양이 독특하나 1970년대 중반까지는 지역 주민 정도만 아는 곳이었다. 1974년 로저 무어 주연의 영화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가 이곳에서 촬영된 뒤 관광명소가 됐다. 카오 핑 칸은 영화에서 악당의 은신처로 묘사됐는데, 정작 ‘제임스 본드 섬’이라는 애칭을 얻으며 푸켓 관광의 필수 코스로 자리잡았다. 대중문화의 영향력을 새삼 실감케 하는 사례다.

□ 대중이 친숙한 영화나 드라마, 가요 등을 활용해 관광자원을 개발하려는 노력은 많다. 2000년대 중·후반 국내 지방자치단체들이 드라마 촬영 유치 경쟁을 치열하게 펼친 적이 있다. 제작비 일부를 지원하거나 촬영 세트까지 만들어주며 유치전을 벌였다. 직접적인 경제 효과보다는 관광객 유입 기대가 더 컸다. 드라마가 화제를 모으면 촬영 지역도 덩달아 관심 받을 것이란 계산이었다. 지역 주민들 앞에서 지자체장과 유명 배우들이 참석한 드라마 제작 발표회까지 할 수 있었으니 지자체 입장에선 꿩 먹고 알 먹기였다.

□ 지자체는 연예인들과 ‘스치기만 해도 인연’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KBS 예능프로그램 ‘1박2일’ 촬영지인 전남 장흥 천관산에는 ‘강호동 길’ ‘이승기 길’ ‘이수근 길’이 생기기도 했다. 방송에서 출연자들이 택한 등산로에 각각 이름을 붙인 것이다. 한류 스타인 가수 승리의 이름을 딴 ‘승리숲’이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다. 역시 한류 스타인 가수 겸 배우 박유천의 이름을 빌린 ‘박유천 벚꽃길’(인천 계양구)도 만들어져 있다. 국내외 팬들이 기부금까지 내놓았으니 ‘연예인 모시기’에 혈안이 된 지자체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고마웠을 테다.

□ 승리가 ‘버닝썬 게이트’로 물의를 빚고 박유천이 마약 양성반응을 보인 사실이 알려지면서 강남구와 계양구가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 지자체가 연예인에게 매달리다 부메랑을 맞은 모습은 ‘연예인 공화국’의 단면을 보여준다. 해외에서도 연예인들을 활용한 도로나 시설물이 적지 않다. 하지만 우리와 다르다. 해당 연예인이 원로가 되거나 죽으면 경의를 표하는 방식으로 이름을 활용한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가 대표적이다. ‘승리숲’과 ‘박유천 벚꽃길’은 조급증과 겉모습에만 휘둘리는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민낯이다.

라제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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