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득자 600명, 대기자 4000명… ‘한 지붕 두 나라’ 가정 속속 
자카르타 시내에 위치한 인도네시아 이민청의 국적 변경 접수 창구. 신청 당사자가 아니면 창구 안으로의 출입이 제한되고, 내부를 찍을 수도 없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자카르타 한인 박모(57)씨는 5년 전 국적을 인도네시아로 바꿨다. 10년 넘게 키운 사업은 번창하는데 대한민국 국적이 발목을 잡아서다. “다른 나라도 엇비슷하지만 인도네시아는 외국인이 사업을 하려면 많은 제약이 따라요. 건설 같은 분야는 투자가 제한되고, 소규모 자영업종은 진출 자체가 불가능해요. 개인이 부동산을 가질 수도 없고, 매년 체류비자 갱신하는 일도 번거롭고요.” 고심 끝에 마음을 고쳐먹으니 바꿔야 할 이유가 넘쳤다. 그러나 아내와 두 자녀는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부부 중 한 사람은 고국에 적을 둬야 할 거 같고, 아무래도 아이들은 교육이 걸려서….” 딸과 아들은 한국에서 대학을 나와 현재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인생에서 참 잘한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남편은 인도네시아 국적을, 아내와 자녀는 한국 국적을 지닌 ‘서류상 국제결혼’, 곧 ‘한 지붕 두 나라’ 가정인 셈이다.

인도네시아 국적을 딴 아버지 권유로 국적을 바꾼 김모(42)씨는 식구 중 어머니만 한국 국적이다. 비슷한 형태의 가족이 인도네시아엔 꽤 있고 앞으로 더 늘어날 전망이다. 이런 국적 변경 증가는 사업 부동산 세금 등 경제적인 이유가 크지만, 꾸준히 양국 간 심리적 장벽을 낮춰 온 교류 및 협력이 반영된 결과라는 풀이도 있다. 젊은 세대들은 미래를 위한 선택, 보수 성향의 일부는 모국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을 거론하기도 한다.

22일 인도네시아 동포사회와 유관기관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고 인도네시아인이 된 한국인이 600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10년 새 두 배가 된 것이다. 여기엔 우리 정부의 집계에 잡히지 않은 인원도 상당수 포함된다. 국적 변경을 신청하고 대기 중인 한국인은 현재 4,000명선인 것으로 알려졌다.

2017년 기준 인도네시아 국적 취득자 누계. 그래픽=김경진 기자

우리나라 법무부는 인도네시아 국적 취득자를 2017년 기준 누적 413명이라고 밝히면서도 “통계가 관리되지 않은 시기가 있어 오차가 발생할 수 있다”고 부연했다. 국적을 바꾸고도 우리 정부에 신고하지 않으면 통계에 잡히지 않는 점 등도 감안해, 인도네시아 현지에선 ‘600명대’가 현실에 부합한다고 보고 있다. 한인회 관계자 등은 “인도네시아 담당 관료부터 ‘한국인 대기자만 4,000명, 국적 취득자는 600명이 넘는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최근 60명이 탈락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한인들의 인도네시아 국적 취득은 뚜렷한 증가 추세다. 2014, 2015년 각 40명 안짝이다가 이후 매년 50명 선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갈수록 국적 변경 신청 기준이 까다로워지고, 절차가 복잡해지고, 기간이 길어지고, 비용마저 올라간 걸 감안하면, 체감 증가세는 더 가파르다고 볼 수 있다. 이모(46)씨는 “국적을 바꾸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주변 친구마저 얼마 전 신청한 걸 보면 분위기가 예전과는 다른 거 같다”고 말했다. 현지 법률사무소인 팍(P.A.K) 로펌의 김민수(43) 변호사는 “최근 들어 부쩍 (국적 변경) 관련 문의가 많고 실제 신청도 많이 늘었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 국적 취득 한국인. 그래픽=김경진 기자

무엇보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자국민 우대 및 현지화 우선 정책이 이유로 꼽힌다. 주로 경제활동을 하는 중년 사업가나 직장인, 자산가가 국적을 바꾸곤 했다. 그래서 남편은 인도네시아 국적, 아무래도 교육 등에 민감한 아내와 자녀는 한국 국적인 서류상 국제결혼, 한 지붕 두 나라 가정이 많아지게 됐다.

공무원 경찰 등 인도네시아 주류사회에 진출하기 위해 일찌감치 인도네시아인으로 살아가는 젊은이도 늘고 있다. 최모(51)씨는 “인도네시아 정부, 공공기관에서도 최근 신(新)남방 정책, 한류 등에 힘입어 한국어를 잘하는 한국계 인도네시아인을 승진이나 인사에서 우대한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의 한국전문가로 키운다는 것이다. “누구 아들이 국적을 바꾼 뒤부터 어디에서 잘 나간대”라는 얘기들이 술자리에서 오갈 정도다.

한국어와 인도네시아어에 능통하면서, ‘외국인 정원(TO)’에 포함되지 않는 인도네시아 국적 한인 청년들은 인도네시아 진출 한국 기업이 선호하는 채용 대상이기도 하다. 현지 진출 한국 금융회사 관계자는 “인도네시아 국적을 가진 한인은 현지인 채용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한국어 TO를 그만큼 확보하는 효과가 있다”라며 “한국어에 능통하고 급여도 줄일 수도 있어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고 귀띔했다. 인도네시아는 고용 창출을 위해 ‘외국인 1명당 인도네시아인 몇 명’ 식으로 자국민 채용을 의무화하고 있다. 또 재산 사업을 물려주려는 부모가 자녀에게 국적 변경을 권하기도 한다. 인도네시아는 상속세가 없다.

인도네시아 이민청 건물 앞에 주차된 이민청 단속 차량. 비자를 갱신해야 하는 외국인에겐 두려운 대상이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일각에선 “한국 정치판이 꼴 보기 싫어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최근 들어 북한에 끌려 다니는 모습이 맘에 안 든다” “돌아가도 환대해 주지 않는다” 등의 서운함을 내비치기도 한다. 타향에서 젊음을 불사르고 노년에 모국에서 여생을 마치고 싶어하는 기존 생각들, 일종의 고정관념에 균열이 생긴 셈이다. 다만 이는 국적 변경의 주된 이유는 아니고, 넋두리에 가깝다.

안선근(55) 국립이슬람대(UINㆍ우인) 교수는 “2006년 인도네시아 국적을 취득해 인도네시아 국회 보좌관으로 일하고 대학 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라며 “예전엔 인도네시아 여권을 들고 공항에 가면 창피해하는 동포들이 많았지만 양국 간 비즈니스와 협업이 늘면서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록 국적은 바꿨지만 이들 역시 대한민국 미래의 든든한 자산이자 신남방 정책의 첨병, 아세안공동체의 일원으로 여겼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올해 수교 46주년을 맞는 인도네시아 거주 한인은 현재 3만1,500명 정도로 추산된다. 국적은 다를지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인도네시아와 대한민국의 튼튼한 가교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자카르타=고찬유 특파원 jutdae@hankookilbo.com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