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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르는 삼월의 노래] 거사 전 쓴 독립운동가 詩 뒤늦게 독립신문에

입력
2019.04.23 04:4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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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절치부심하는 방랑객이지만…” 

 이중교 폭탄 투척 의열단 김지섭 선생 詩 

1924년 1월 19일자 독립신문 170호에 실린 김지섭 선생의 시 ‘주중(舟中)’. 독립기념관DB.
1924년 1월 19일자 독립신문 170호에 실린 김지섭 선생의 시 ‘주중(舟中)’. 독립기념관DB.

일본 법률을 방패 삼아 독립운동가를 지근 거리에서 지킬 수 있었던 건 율사(律士)만의 특혜였다. 조선의 범인(凡人)들은 나라 잃은 설움을 숨죽여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문학으로 예술성을 추구하기 어려운 시대였지만 근대문학은 3ㆍ1 운동을 계기로 크게 발전했다. 독립운동가와 민중은 ‘독립신문’과 ‘혁명공론’, ‘진광’, ‘조선의용대’, ‘신한민보’ 등에 먹과 종이로 울분을 토해냈다.

1922년 8월 1일자 독립신문 135호 1면에 실린 작가 미상의 시(詩) ‘웬일이냐’는 죄 없는 동포들이 일제에 희생당한 비보를 애달프게 노래한 작품 중 하나다. 독립운동을 하다 감옥에 갇힌 한 집안이 스러져가는 상황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웬일이냐/져 아헤는 왜 우러/ 감옥에 잇난 아버지 생각/ 간절해서 운다 해요// 웬일이냐/ 저 집의 소동이/ 독립운동에 관계 잇다고/ 왜놈이 와서 가택 수삭!/ 그래서 소동이래요// 웬일이냐 져 부인은 어디를 급작이!/ 철창 속에 잇난 남편에게/ 의복차입 하랴고/ 그래 급작이 간대요// 웬일이냐 개화몽딍이 든 자가 내 집에/ 말 한마듸 못하는 변호사 놈/ 착수금이나 내라고 왓대요.’

독립운동가가 거사를 위해 떠나며 쓴 시도 담겼다. 일본 궁성 입구인 이중교(二重橋)에 폭탄을 투척한 의열단원 김지섭 선생(1884~1928)은 1923년 12월 일왕을 처단하기 위해 상하이(上海)에서 도쿄(東京)로 향하는 배에 올라 시 ‘주중(舟中)’을 썼다. 이듬해 1월 5일 그가 투척한 폭탄이 불발되고 현장에서 검거된 소식은 일제의 탄압으로 신문에 뒤늦게 실렸지만, 거사를 떠나며 결의를 돋운 선생의 시는 2주 뒤인 1924년 1월 19일자 독립신문 170호에 실렸다. ‘만 리 길 훨훨 좁쌀 같은 이 한 몸/ 배 안은 모두 왜적이라 누구와 친하게 지낼 것인가/ 장량(長良)은 쇠몽치로, 형가(荊軻)는 칼을 품고 진시황을 죽이려 했고/ 노중련(魯仲連)은 동해(東海)로, 굴원(屈原)은 상수(湘水)로 가는 생각이 잦네/ 오늘은 절치부심하는 방랑객이지만/ 옛적에는 와신상담하는 사람이었다네/ 이번 행차는 평생의 의지로 결정하였으니/ 관문으로 가지 않으면 다시 나루터를 묻겠네.

독립신문에 시를 쓴 인물은 모두 독립운동가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가 지난해 11월 펴낸 ‘피로 묵(墨) 삼아 기록한 꽃송이’에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쓰인 178편의 시가 담겼다. 시를 쓴 이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호나 특이한 필명을 사용했다. 독립신문 창간멤버 주요한(1900~1979)은 ‘송아지’ ‘목신(牧神)’, 이름 가운데 글자를 딴 ‘요(耀)’와 같은 필명을 쓰며 독립신문에 가장 많은 시(10편)를 실었다.

더러는 본명을 썼다. ‘일재(一齋)’라는 필명으로 시 8편을 발표한 김병조(1877~?) 선생은 ‘일재(一齋) 김병조’와 같이 호와 본명을 함께 썼다. 독립신문은 잦은 폐쇄 명령과 변절자들의 이탈, 재정적 어려움에 따른 위기로 정간되거나 신문을 제때 찍어내지 못 하는 일이 있었지만, 임시정부 거처를 옮기거나 발행처를 다른 곳으로 적어 가며 비밀리에 다시 발행됐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문학작품에서도 우리 민족의 수난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이태준(1904~?)의 ‘패강랭(浿江冷)’은 일제의 감시를 고려한 듯 담담한 어조를 유지하지만 ‘대동강이 차다’는 제목 뜻처럼 험난했던 시대 상황을 보여준다. 작품 속에서 도시시찰을 다니며 일본을 오가는 부회(府會)의원 김(金)은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가는 반면, 고등 보통학교(일제강점기의 4~5년제 중등교육기관)에서 조선어와 한문을 가르치던 박(朴)은 학교에서도, 시대 전체에서도 긴요하게 여겨지지 않아 지싯지싯 붙어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강의시간은 반으로 줄었고 전임교원에서 알아서 물러나 시간제 교사로 다녀주기를 바라는 눈치다. 박은 ‘수염도 깎은 지 오래어 터부룩한 데다 버릇처럼 자주 찡그려지는’, ‘전에 못 보던 비웃는 웃음’을 자주 짓는다. 식민지 압제의 혹독한 시절을 견디는 대한 민족의 삶이 박의 표정으로 대변된다.

기생 영월은 평양 여성의 상징과 같았던 머릿수건이 일제의 금지령으로 사라진 이야기를 일러준다. ‘조선 자연은 왜 이다지 슬퍼 보일까?’ 하고 뱉는 주인공 현(玄)의 독백이나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이 망명길에 올라 지은 시의 한 구절인 ‘각한산진수궁처 임정가곡역난위(却恨山盡水宮處 任情歌哭亦難爲: 산도 막히고 물도 다한 곳에 다다라 문득 한탄하노니, 마음 놓고 노래 부르고 울부짖기도 어렵구나)’를 인용해 슬픈 심정을 드러냈다.

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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