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회심의 승부수 ‘변방소’ 
'벽위편'에는 다산의 '변방소'에 대해 정조가 신하들에게 솔직한 생각을 묻는 장면이 나온다. 오태증이 다산이 천주교를 버리지 않았다고 하자 정조가 수긍한 내용. 정민 교수 제공
 ◇정조의 집착 

다산은 1796년 11월 16일에야 마침내 규장각 교서관으로 임금의 부름을 받았다. 이때의 상황은 ‘규영일기(奎瀛日記)’에 보인다. 당시 ‘사기’와 ‘한서’ 중에 정수를 가려 뽑아 ‘사기영선(史記英選)’ 간행 작업이 막바지였다. 다산의 맵짠 솜씨가 필요했다. 다산은 어명을 받고 채제공의 자문을 받아 유득공, 박제가 등과 함께 교정 작업에 참여했다.

며칠 뒤 정조는 다산을 정3품의 병조참지(兵曹參知)에 낙점했다. 1787년 8월에 ‘병학통’을 선물하며 장수의 재목으로 칭찬한 이래로, 임금은 틈만 나면 다산을 병조(兵曹)의 무관직에 앉히려 했다. 장차 다산을 병조판서 감으로 점 찍어 둔 터였다. 다산은 그때마다 거부했다. 1795년 2월에도 다산은 병조참지에 임명됐었다. 이때 군호(軍號)를 잘못 지은 벌로 1백운의 시를 하루 밤 사이에 올리는 벌을 받았다. 3월에는 숙직 하면서 군복을 입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의금부에 구금되기까지 했다.

이번에도 다산은 병조참지에 임명된 지 보름만인 11월 30일에 병을 핑계로 사직을 청했다. 정조가 한 번 더 임명했고, 다산은 또 사직을 청했다. 임금은 못 이기는 체 12월 2일에 다산을 좌부승지로 올렸다가, 12월 11일에 다시 병조참지에 임명했다. 임금과 신하는 계속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1797년, 다시 해를 다시 넘기고서도 지루한 시간은 잘 가지 않았다. 다산은 가끔씩 임금의 부름에 따라 교서(校書) 작업이나 도우면서 할 일 없이 지냈다. 5월, 명례방 집에 석류꽃이 막 피고 보슬비가 갓 개었다. 여름 냄새가 물씬했다. 답답했던 다산은 그 길로 서울을 무단 이탈해서 불쑥 고향집이 있는 초천으로 달려갔다. 단오 하루 전날이었다. 모처럼 형님들을 모시고 일가 사람 서넛과 함께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아 건너편 남자주(濫子洲)로 가서 매운탕을 끓여 맛있게 먹었다. 형제는 내친 김에 배를 몰아 천진암(天眞庵)으로 진출했다. 꽃 향기에 취하고, 냉이와 고사리, 두릅 등 대여섯 가지 나물도 실컷 먹고 사흘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답답함을 하소연하다 

1797년 6월 초에 다산은 이조참판으로 있던 족부(族父) 정범조에게 ‘여름날의 술회. 족부 이조참판께 올리다(夏日述懷 奉簡族父吏曹參判).’란 장시를 지어 올렸다. 시 한 수가 5언 660구, 3,300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장편이었다. 정범조의 평생을 따라가며 그 맑은 정신과 기개를 높이는데 3분의 2의 분량을 할애했고, 나머지에 자신의 현재 심경을 적었다. 당시 다산은 할 일이 없었으므로, 다산이 지은 전체 시 중에서 가장 길 이 작품에 자신의 모든 역량을 결집시켜 자못 비장한 감회를 토로하였다. 이 가운데 자신의 심회를 서술한 한 대목은 이렇다.

실족하여 비이슬의 은택 못 받고 踜蹭違雨露

호젓하게 아침저녁 보내고 있네. 蕭灑送朝晡

달을 보며 오사모(烏紗帽)를 비뚤게 쓰고對月欹烏帽

바람 쐬며 막걸리를 들이킨다네. 臨風倒白酤

솔 곁에서 이따금 꾸물거리다松邊時偃仰

꽃 아래 혼자서 서성대누나. 花下獨踟躕

(중략)

아침이면 다조(茶竈)에다 불을 지피고茶竈朝添爇

저녁에는 서재에서 홑이불 덮네. 書牀晩掩裯

게을러서 손님 와도 앉아 절하고慵疏迎客夎

아이와 함께 기며 놀이를 하지. 嬉戲與孩匍

무료한 하루 일과를 진솔하게 그렸다. 한 마디로 미칠 지경이니 제발 어떻게 좀 해달라는 탄원서나 다름없었다.

 ◇동부승지 사직과 ‘변방소’ 

이것이 효과가 있었던지, 며칠 뒤인 6월 20일에 다산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다시 부름을 받았다. 하지만 처사촌인 홍인호가 당시 좌승지로 승정원에 있었으므로, 인척이 한 기관에 함께 근무한다는 혐의 때문에 다산은 이 부름에 응할 수가 없었다. 이튿날 다산은 그간 자신을 향해 쏟아졌던 비방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세세하게 밝힌, 실로 장문의 동부승지 사직 상소를 올렸다. ‘자명소(自明疏)’ 또는 ‘변방소(辨謗疏)’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비방을 해명하며 동부승지를 사직하는 상소(辨謗辭同副承旨疏)’가 그것이다.

절대 하루 만에 쓸 수 없는 작심하고 쓴 글이었다. 진작부터 준비해둔 회심의 승부수였다. 이 글에서 다산은 자신이 동부승지의 자리에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를, 오로지 천주교 문제에 초점을 맞춰 장황하다 싶을 만큼 자세하고 솔직하게 썼다. 중간중간 건너뛰며 핵심만 간추려 읽는다.

“신은 이른바 서양의 사설(邪說)에 관한 책을 일찍이 보았습니다. 그저 보기만 했다면 무슨 죄가 되리이까? 마음으로 기뻐하며 사모하였고, 이것으로 남에게 뽐내기까지 했습니다. 신이 이 책을 본 것은 20대 초반입니다. 본시 능히 세심하게 살필 수 없어 그 지게미와 그림자조차 얻지 못하고, 도리어 사생(死生)의 주장에 휘둘리고, ‘칠극(七克)’의 가르침에 귀가 쏠리며, 기이하고 떠벌린 글에 현혹되었습니다. 유문(儒門)의 별파로 알고, 문단의 기이한 감상거리로만 보아, 남과 얘기할 때도 아무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누가 비난하기라도 하면 과문하고 못나서 그러려니 여기기까지 했으니, 본래 뜻은 기이한 견문을 넓히려 한 것일 뿐입니다. 하물며 벼슬길에 나간 뒤로 또 어찌 능히 방외에 마음을 쏟을 수 있었겠습니까? 불행히도 1791년 진산사건의 변이 일어나, 신은 이 후로 분개하고 가슴 아파하며 마음으로 맹세하여 이를 원수처럼 미워하고 역적같이 성토하였습니다. 신의 경우 당초에 서학에 물든 것은 아이들의 장난과 같았는데, 지식이 조금 자라자 문득 원수로 여겼고, 분명하게 알게 된 뒤로는 더욱 엄하게 이를 배척하였습니다. 깨달음이 늦다 보니 미워함도 더욱 심해, 심장을 갈라 보여도 실로 아무 남은 것이 없고, 구곡 간장을 뒤져본들 남은 찌꺼기가 없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신을 어여삐 여겨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시 이렇게 거두어 쓰셨지만, 매번 사단이 날 때마다 문득 지난 잘못을 허물하신다면 꿈에도 생각이 미치지 않았는데도 더러운 오물을 먼저 뒤집어 써서, 지쳐 기운이 빠진 채로 그저 앉아 조롱만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까지 그래 왔으니 앞으로도 어찌 다르겠습니까? 이럴진대 신은 차라리 계속해서 내쳐진 채로 있으면서, 때로 굽혀지고 때로 부름 받아 한갓 임금의 은혜를 크게 욕되게 하고, 나아가 죄를 더욱 무겁게 지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시옵소서.”

‘변방소’는 번번이 자신을 천주교의 틀에 가둬 옥죄는 이 사슬을 원천적으로 끊어달라는 탄원에 가까웠다. 사직의 명분은 홍인호와 인척간이어서 승정원에서 동시에 근무할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상소문에는 이에 관한 내용이 단 한 줄도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천주교와 관련된 자신의 입장 해명뿐이다. 다산으로서는 천주교 문제를 공개적이고 과감하게 정면 돌파 함으로써 더 이상 이 꼬리표를 달고 벼슬길에 오르지는 않겠다는 승부수를 던진 것이었다.

이를 읽은 정조는 “상소문은 자세히 살펴보았다. 착한 마음의 단서가 마치 봄기운에 만물이 싹터 나오는 듯 성대하다. 종이에 가득 자신에 대해 열거한 내용은 그 말을 듣고 감동하기에 충분하다. 너는 사양치 말고 직책을 맡으라”는 비답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조정 대신 들 앞에서 “이후로 정 아무개는 허물이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면죄부를 주겠다는 뜻이었다.

 ◇진작 써둔 상소문 

사실 이 ‘변방소’는 2년 전 금정에 내려가기 전에 이미 초를 잡아 둔 것이었다. 당시 충주목사로 좌천되어 간 이가환이 ‘자명소’를 올렸을 때, 다산도 같이 올릴 작정으로 준비했던 듯하다. 1795년 12월 1일 이삼환이 다산에게 보낸 답장에 나오는 내용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금정일록’에 실린 이삼환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예전 어떤 사람이 문중자(文中子)에게 비방을 그치게 하는 방법을 물었다더군요. 그는 ‘변명하지 말라’고 대답했답니다. 이는 단지 비방을 그치게 하는 것뿐 아니라, 또한 우리들이 본바탕을 함양하는 공부에 있어서도 마땅히 힘을 얻는 데 보탬이 될 것이니, 어찌 생각하시오.”

다산이 ‘변방소’의 초고를 이삼환에게 보여주며 변방(辨謗), 즉 비방에 대해 해명하는데 대해 의견을 구하자, 이삼환은 ‘무변(無辨)’ 즉 변명하지 않는 것이 비방을 그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대답해준 것이다.

1797년 6월 21일, 다산이 기어이 ‘변방소’를 올린 뒤 우의정 이병모를 만났을 때, “대감께서 평소 시험 답안을 잘 감별하는 것으로 조정에서 유명하시니, 소인이 올린 상소가 갑작스럽게 지은 것이 아닌 줄을 살펴보고 아셨을 것입니다. 상소문의 초고를 완성한 것이 이미 오래고 보니, 서로 아끼는 친한 벗 중에 절로 읽어 본 사람이 많습니다”라고 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다산의 또 다른 일기 ‘함주일록(含珠日錄)’은 1797년 6월 20일 동부승지를 제수받던 날 시작해서 윤 6월 초 6일까지 근 보름간의 일기다. 일기 전체에 자신의 ‘변방소’를 두고 오간 조정 대신들과의 대화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과장스럽게 느껴질 만큼 칭찬 일색이라, 읽기가 낯간지러울 정도다.

일기에 따르면 이익운과 홍인호뿐 아니라 원수였던 목만중 조차 “상소문이 과연 훌륭하다. 그대의 심사가 광명하여 구차하지 않으니, 상소의 뜻이 이와 같음을 진실로 알겠소”라며 칭찬했다. 이밖에도 일기에는 심상규, 오태증, 한만유를 비롯해 모든 조정 대신들이 한 입으로 천고의 명소(名疏)라고 입을 모았다. 병조판서 이조원(李祖源)은 입에 침이 마르게 감탄한 뒤 서자와 어린 손자를 불러 따로 다산에게 인사를 시킨 뒤, “훗날 이 아이들에게 영공의 상소를 읽히게 하리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과연 그랬을까?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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