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민족 울분 표현한 시대의 흥행작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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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명동학교에 입학한 나운규가 교복을 입고 있는 모습. 독립기념관 제공

무성영화 시절은 변사의 전성시대였다.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변사의 해설이 어떤가에 따라 듣는 내용은 얼마든지 달라지곤 했다. 단성사의 인기 변사 성동호는 이러한 변사의 특권을 십분 활용할 줄 안 사람이었다. 당시 극장에는 임검석(臨檢席)이라 하여 종로경찰서 보안계에서 파견한 순사가 앉아 영화나 공연을 감시하고 내용을 검열하는 좌석이 따로 있었다. 조선 영화 한 편을 상영하는 날, 임검석이 비어있는 걸 본 성동호는 평소의 무난한 내용을 버리고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고 한다. “3.1 운동이 있은 후 받은 고문으로 미쳐버린 영진.” 극장에서 틀고 있던 영화는 바로 춘사 나운규(1902~1937)의 ‘아리랑’(1926)이었고, 영화는 조선인 관객들의 민족의식을 한껏 고양시키며 흥행에 성공한다.

나운규의 영화계 첫 경력은 배우로 출발했다. 1924년 영화사 조선키네마의 연구생으로 입사한 그는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1925)에서 가마를 멘 가마꾼으로 단역 데뷔를 했으며, 연이어 장녹수를 다룬 ‘암광’(1925)에서 부하의 여동생을 빼앗으려는 운룡이란 인물로 조연 출연한다. 같은 해 조선키네마가 해체되자 “조선 사람의 손으로 순 조선영화의 제작”을 모토로 독립하여 프로덕션을 차린 윤백남은 이경손의 ‘심청전’(1925)에서 심봉사 역으로 나운규를 기용한다. 비중 있는 배역을 맡은 나운규는 대본 전체를 암송하고 시각장애인의 생활습관을 재현하기 위해 시각장애인이 사는 민가를 직접 찾아가는 등 열의를 갖고 연기에 임했다고 한다.

1926년 영화 '아리랑' 촬영을 마치고 출연진과 스태프가 찍은 기념사진.
◇ 하품 나는 조선영화를 벗어나라

이듬해 이규설의 ‘농중조’(1926)에서 펼친 열연이 “처음부터 끝까지 흐리멍텅한 중에 선 굵은 연기로 홀로 뛰어났다.”(동아일보 1926년 6월 27일자)는 호평을 받으며 나운규는 일약 주목 받는 배우의 반열에 오른다. 그러나 예술가로서 나운규의 야심은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었다. 고향 친구였던 윤봉춘 감독의 증언에 따르면 나운규는 평소 지도를 받았던 이경손 감독의 민요 창작노트에서 발상을 얻어 ‘아리랑’의 각본을 썼다고 한다. 체계적인 연출 수업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일찌감치 영화감독에 뜻이 있었던 것이다. 이 각본을 눈여겨본 건 앞서 ‘농중조’를 창립작으로 내세운 조선키네마 프로덕션(1924년 부산에서 창립. 조선키네마와는 별도의 회사)이었다. 1,200원의 제작비 지원에 주연과 감독직을 겸하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은 나운규는 서울 안암동의 한 산골마을에서 4개월간의 촬영에 돌입한다.

1936년 11월 발간된 조선영화 제1호를 들추면 나운규가 ‘아리랑’을 만들었던 10년 전을 회고하며 쓴 글을 찾을 수 있다. 지면에서 그는 “관객은 조선 사람이 나온다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조선영화는 따분하다. 졸음이 온다, 하품이 난다, 돈 내고 볼 재미가 없다, 이런 소리가 나기 시작해서”라며 침체기를 겪던 조선 영화계의 상황을 서술한다. 그는 “그리피스의 ‘폭풍의 고아’(1921)를 보던 관중은 참다못해 발을 굴렀고,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의 ‘로빈 후드’(1922)는 조선 관객의 손바닥을 아프게 했다”며 수입 외화가 인기를 끌고 있는 당시 극장가의 풍경을 언급하기도 한다. “이 작품(‘아리랑’)을 시작할 때 깊이 느낀 것은 졸리고 하품나지 않는 작품을 만들리라” 다짐했던 감독 나운규의 진지한 면모가 글에 담겨있다. 나운규는 ‘아리랑’을 촬영할 때 전례를 찾기 힘들게 800명에 달하는 엑스트라를 동원했는데 “외국물 대작만 보던 눈에 빈약한 감을 없게 하려면 사람을 많이 출연시켜야 한다”는 연출가로서의 계산이 깔려있었다.

영화 '아리랑'.
◇ 6ㆍ25 직전까지 상영된 흥행작

“현대 비극 웅대한 규모! 대담한 촬영술! 조선 영화 사상의 신기록!”(조선일보 1926년 10월 1일자)이라는 선전문구와 함께 ‘아리랑’은 1926년 10월 1일 단성사에서 개봉한다. “구극(舊劇)의 구조를 탈피한 이 작품은 마치 어느 의열단(義烈團)원이 서울 한 구석에 폭탄을 던진 듯한 설레임을 느끼게 했다‘는 당시의 평은 ’아리랑‘에 대한 호응이 얼마나 뜨거운 것이었는지를 능히 짐작하게 한다. 극장 안은 눈물바다가 되었고 관객 모두가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 지나치게 많은 인파가 몰려든 나머지 단성사는 문짝이 부서졌으며,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극장 앞에 기마경찰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홍보 과정에서 1만장의 전단이 경찰 당국에 의해 압수당하는 불운(’문전의 옥답은 다 어디가고 / 동냥의 쪽박이 웬일인가?‘라는 문구가 법에 저촉된다는 이유였다)을 겪었지만 영화는 온 극장을 순회하며 장기 흥행에 돌입했다. 심지어 조선키네마 프로덕션의 사장 요도 도라조가 더 이상의 수익을 기대하지 않고 단성사의 임수호에게 전국흥행권을 팔아 넘겼음에도 ’아리랑‘은 2년이 넘도록 흥행가도를 달렸고, 6ㆍ25 전쟁 직전까지도 서울에서 번번이 재상영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숱한 조선 영화들이 겪은 운명처럼 ‘아리랑’의 필름 또한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다. 다만 영화소설 ‘아리랑’(이 책에 영화의 스틸사진 4컷이 수록되어 있다)을 비롯한 문헌 자료와 1928년에 변사 성동호의 대사와 해설, 여가수 유경이의 노래를 녹음한 ‘영화해설 아리랑’의 레코드판을 통해 원형을 짐작해볼 따름이다. ‘개와 고양이’라는 자막이 뜬 뒤 주인공 최영진과 지주 오기호가 서로를 노려보는 클로즈업으로 ‘아리랑’은 시작된다. 영진의 아버지는 아들의 공부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전답을 팔았고 지주 기호의 소작농으로 전락한 상태다. 전문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다 퇴학당한 영진은 분명치 않은 이유로 실성해 고향친구 윤현구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할 만큼 미치광이가 되어있다. 영진의 동생 영희는 오빠 대신 현구를 맞이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차츰 사랑의 감정이 싹트게 된다.

그러나 추수가 끝날 즈음 상황은 위기로 치닫는다. 영진의 아버지에게 빚을 갚든가 아니면 영희를 내주라고 협박을 가하던 기호는 집을 지키던 영희를 강제로 겁탈하려 하고 현구는 기호를 막고자 하지만 나가떨어지고 만다. 이 광경을 이죽거리며 지켜보던 영진은 순간 사막을 배경으로 한 환상을 본다. 아라비아 상인을 만난 나그네는 물을 달라고 애원하지만, 상인은 매몰차게 거절하며 나그네를 걷어찬다. 다른 곳에서 나타난 젊은 남녀도 상인에게 물을 달라 요청한다. 이에 상인은 물을 모래바닥에 쏟아버리며 여자에게 남자를 버리고 자신에게 오면 물을 주겠다며 유혹한다. 분을 참지 못한 남자가 상인에게 덤벼들고, 나그네도 합세해 칼로 상인의 목숨을 끊는다. 현실에선 영진의 낫이 기호의 가슴팍을 꿰뚫고 그때서야 영진은 제정신을 되찾는다.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순사에게 끌려가면서 영진은 '나는 이 삼천리에 태어나 미쳤다'고 외치고 고개를 넘어간다. 주제가인 아리랑이 흐르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1926년 영화 '풍운아' 에 출연했을때의 나운규.
◇ ‘아리랑’ 성공 후 혹독한 검열

시인이자 평론가였던 임화(1908∼1953)는 ‘조선영화발달소사’에서 ‘아리랑’을 두고 “그 시대를 휩싸고 있던 시대적 기분이 영롱하게 표현돼 있었으며 (중략) 사람들은 이 작품에서 조선의 인상, 풍경, 습속 이상의 것을 맛보는 만족을 얻었다”고 평한다. ‘아리랑’은 ‘춘향전’(1923)이나 ‘장화홍련전’(1924) 등 고전 설화의 서사적 전통에 목매고 있었던 조선 영화의 매너리즘을 깨뜨리는 한편, 부도덕한 강자와 억압받는 민중 간의 갈등 구도를 통해 식민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수탈과 저항 관계를 은유해 저항을 꿈꾸는 민족의 열망에 부응하는데 성공했다. 영화계에 투신하기 전, 홍범도 산하의 독립군으로 연해주를 떠돌며 항일전을 펼치고, 회령-청진 간 철도 폭파 사건에 가담해 1년 6개월 징역을 살았던 반골 나운규에게 있어 영화란 독립운동의 또 다른 형태였는지도 모른다.

‘풍운아’(1926) 이후 나운규의 경력은 갖은 수난으로 점철되었다. 나운규 프로덕션이 제작한 영화의 필름은 검열의 손길에 무더기로 잘려나갔고 말년의 거듭된 실패는 그의 명성을 갉아먹었다. 유성영화를 시도한 ‘오몽녀’(1936)가 회심의 역작으로 찬사를 받았지만 7개월 후인 1937년 8월 9일, 나운규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향년 36세. 한국영화사의 새 장을 열었던 천재의 때 이른 퇴장이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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