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시위는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에서도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다. ‘3ㆍ1독립선언서’는 이미 2월 말 그밖에 개성 서흥 수안 사리원 해주 대구 마산 등에도 배포되었다. 일제 군경의 살상 진압에도 불구하고 4월 말까지 200여 군에서 200만여 명이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지금처럼 인터넷 등이 발달하지 않았는데도 3ㆍ1운동은 어떻게 전국에서 일제히 거족적으로 전개되었을까?

일제는 무단통치를 펼쳐 한국인의 언론 집회 결사 등을 엄격히 금압했다. 그럼에도 각계각층은 지연 혈연 학맥 인맥 종교 향약 등을 통해 서로 엮여있었다. 유림은 서당, 천도교도는 교단, 기독교도는 교회, 불자는 사찰, 학생은 학교, 주민은 동계 등을 매개로 서로 소통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은 이들을 종횡으로 묶고 지휘하는 역할을 했다. 중앙과 지방을 아우르는 연대와 공조가 3ㆍ1운동을 추동한 힘이었다.

일제가 침략과 수탈을 위해 부설한 철도는 역설적으로 3ㆍ1운동을 전국에 확산시키는 매체로 활용되었다. 3ㆍ1운동 당시 한반도에는 경인선(서울-인천) 평남선(평양-진남포) 경부선(서울-부산) 경의선(서울-신의주) 경원선(서울-원산) 호남선(대전-목포) 마산선(삼랑진-마산) 등이 사방으로 뻗고, 건설 중인 함경선(원산-회령)도 군데군데 영업을 했다. 1936년 8월 동아일보 기자로서 손기정 마라토너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 보도한 이길용은 3ㆍ1운동 당시 조선총독부 철도국에 근무하면서 열차로 독립선언서와 대한민국임시정부문서를 운반했다. 오산학교 교장 이승훈도 열차를 타고 서울과 서북지역을 왕래하며 3ㆍ1운동의 불씨를 지폈다. 철도역은 여객의 출입이 빈번하고 인근에 5일장을 거느리고 있어서 사람 물자 정보의 유통이 빠르고 활발했다. 조선총독부가 만든 ‘소요일람지도’(1919.4.30, 극비)에 시위와 발포 지역이 철도연선이나 장시개설지에 밀집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독립만세시위는 3월 초 서울을 비롯해 평안남도, 3월 중순 함경남북도 경상북도 전라북도, 3월 말 경기도 충청남북도에서 각각 정점을 찍고, 4월 초 전국 대부분 지역으로 번졌다. 처음에는 북부지역이 두드러졌는데, 인구밀도에 비해 철도망이 조밀하고 역을 거점으로 장시가 새로 많이 생긴데다 기독교와 천도교 등의 교단조직이 강했기 때문이다. 장터에 운집한 군중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이태왕 봉도식’과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다. 서울과 평양 등에서 독립선언서나 태극기를 가지고 고향에 돌아온 유지와 학생 등이 각 지역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했다. 대체로 도회지나 철도연선은 기독교인이, 농촌이나 산간지역은 천도교인이 앞장섰는데, 시위양상은 조금씩 달랐다.

한 예로,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은 1919년 3월 5일 남대문역(지금 서울역) 광장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10일 휴교령이 내리자 13일 기차를 타고 귀향했다. 17살 유관순에게 이것은 너무 놀라운 경험이었기에, 기차의 덜커덩 소리가 ‘조선독립’을 부르짖는 소리로 들렸다. 천안역에 내려 고향 아우내(병천)에 온 유관순은 아버지 유중권과 마을유지 조인원 등에게 서울 정황을 전하면서 독립선언서를 내놓았다. 그들은 아우내장이 열리는 4월 1일 독립만세시위를 열기로 하고 예배당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장날이 오자 주동자들은 ‘대한독립’이라는 깃발을 세우고, 장꾼과 농민을 모아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시위를 선도했다. 일본관헌은 태극기 500여개가 넘실대는 독립만세시위에 질겁하여 살상을 불사하는 폭력진압에 나섰다. 유중권은 살해되고 유관순은 체포되었다. 3,000여명으로 불어난 시위군중은 헌병주재소에 몰려가 항의했다.

3ㆍ1운동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직업여하를 뛰어넘어 ‘민족’이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독립’이라는 목표를 향해 함께 돌진한 민족운동이자 민중운동이었다. 그렇지만 3ㆍ1운동이라는 단일이름으로 굳어졌다 해서 그 속에 내재된 지역적 역사적 다양성이나 이질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3ㆍ1운동의 자율적 다원적 전개양상을 제대로 파악해야 연대와 공조의 소중한 가치는 물론이고, 그 후에 분출된 민족민중운동의 갈래를 정확히 짚을 수 있다. 100주년의 함성이 한쪽으로만 쏠린 느낌이다.

정재정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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