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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익 30%” 수천억원 다단계, 7년간 아무도 신고 안 했다

입력
2019.02.19 04:40
수정
2019.04.16 23:12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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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범죄, 당신을 노린다] <1> ‘성광’ 다단계 사건

※사기를 포함한 지능범죄는 정보기술(IT)의 발달과 함께 더욱 고도화하고 있습니다. 일확천금의 미끼에 낚이는 순간, 당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 지능범죄 시리즈는 매주 화요일 그 덫을 피해가는 지혜까지 전해드립니다.  

통장에 매달 꼬박꼬박 입금 ‘신뢰’… 실상은 신규 투자받아 돌려막기

돈 끌어와도 “기다려라” 밀당… 더 애타게 만들어 투자 경쟁 부추겨

장성ㆍ고위공무원 등도 사기 당해… 돈 못받을까 쉬쉬 ‘피해 눈덩이’

성광피라미드 조직 및 수당 체계 _ 송정근 기자
성광피라미드 조직 및 수당 체계 _ 송정근 기자

귀를 쫑긋 세웠다. 경기 파주에서 옷 가게를 하던 강희영(가명·53)씨는 김영미(가명)씨의 ‘비법’이 늘 궁금했던 터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김씨는 강씨 가게의 큰 손 단골. 별 일 아니라는 듯 툭툭 옷을 집어가는데, 이리저리 계산해보면 매달 100만 원어치씩 옷을 사갔다. 무슨 괜찮은 벌이가 있길래 저럴까, 따로 하는 재테크라도 있을까, 친분이 깊어지자 슬쩍 떠봤다. 말할 듯 말 듯, 김씨는 입을 열었다. 그는 ‘성광’이란 회사에 대해 말했다.

“일본 오락기 파친코라고 들어봤지? 우린 불법인데 이게 미국에선 합법이거든. 미국 땅덩어리가 좀 커? 이걸 사서 미국에 있는 오락실에다 쫙 까는 거지. 그래서 임대수익을 투자자한테 나눠주는데, 우리 남편은 18년 넘게 하던 중장비 사업도 접고 여기 투자한다니까.”

게임기 한 대 가격은 1,100만원. 게임기를 사면 대신 3년 동안 매달 50만~60만원 정도의 수수료를 챙길 수 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반쯤 혹한 강씨를 옭아맨 결정타는 김씨가 보여준 통장. 김씨는 여러 대에 투자한 덕분에 2년 넘도록 매달 1,000만원대 수수료가 꼬박꼬박 들어왔다며 자랑하듯 통장을 내밀었다. 강씨는 화들짝 놀랐다. 1,100만원을 넣어서 월 50만원, 연 600만원 정도를 3년간 챙길 수 있다면 대충 계산해봐도 연 수익률이 20~30% 수준이다. 저금리 시대에 놀라운 수치다.

[저작권 한국일보] 성광이 소개한 사업 구상 _ 송정근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성광이 소개한 사업 구상 _ 송정근 기자

몸이 단 강씨는 김씨를 졸라 2014년 마침내 게임기 2대를 샀다. 강씨가 원래 신청한 건 4대. 그런데 회사는 강씨에게 2대만 배정했다. 왠지 뭔가 더 철저한 것 같아 더 믿음이 갔다. 이후에도 순탄했다. 별 문제 없이 2년간 수수료를 착착 가져다 줬다. 그래서 2016년엔 회사가 주관하는 시험도 치르고 정식 판매원이 됐다. 판매원이 되면 게임기 가격을 50만원 정도 깎아줬기 때문이다. 판매원이 되고서는 더 열심히 투자했다. 주변에도 적극 권했다. 강씨 설득에 노부모는 노후자금을, 결혼을 앞둔 사촌동생은 결혼자금을, 삼촌은 퇴직금을 털어 넣었다. 이렇게 강씨 일가가 투자한 돈은 모두 15억원.

그런데 몇 달 안 가 일이 묘하게 틀어지기 시작했다. 2017년 1월4일 성광의 이미영(가명·54) 대표가 경찰에 구속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화들짝 놀랐는데 회사측은 “세금 문제로 경찰 조사를 받게 됐을 뿐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그 달 말, 한번도 빼놓지 않고 착착 들어오던 수수료가 딱 끊겼다. 부랴부랴 회사를 찾아갔더니 이미 회사 인근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투자자들로 넘쳐 나고 있었다. 전세를 월세로 돌려서 투자한 사람, 돌아가신 부모님의 사망보험금을 투자한 사람, 강씨처럼 다들 저마다의 사연 또한 다양했다. 강씨 일가가 그나마 수수료 명목을 받은 돈은 3억원. 원금 15억원 중 12억원은, 그렇게 허공에 뿌려졌다.

경찰 수사가 끝나고서야 이들은 성광이 실은 불법 다단계 회사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게임기 임대업이란 거짓말이었고, 실상은 그저 돈 돌려막기뿐이었다. 성광은 7년 동안 4,000여명에게서 5,100억원의 투자금을 거둬들였다. 놀라운 건 7년의 세월 동안, 경찰엔 한 통의 신고 전화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을 다룬 서울 수서경찰서 신종선 수사관은 그래서 이들 수법을 두고 “혀를 내두를 수준”이라 했다. “보통 불법 다단계 회사는 금방 들통 날까 봐 짧게 치고 빠지는 방식으로 운영되지요. 그런데 이 회사는 7년간 했거든요. 그만큼 치밀하고 조직적이었다는 얘기입니다. 수조원대 다단계 사기를 벌인 조희팔 사건이 떠올랐을 정도였습니다.” 투자금을 떼인 이들은 3,000여명, 떼인 돈은 1,800억여 원으로 추산된다. 피해자들 중엔 강씨 같은 사람뿐 아니라 군 장성, 고위공무원, 증권사 애널리스트처럼 사회 엘리트층도 수두룩했다. 도대체 성광은 어떻게 이런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던 걸까.

성광피라미드 실제 구조 _ 송정근 기자
성광피라미드 실제 구조 _ 송정근 기자

◇2009년 다단계의 시작

성광, 더 정확히 성광테크노피아(중간에 ‘성광월드’로 변경)의 공동운영자는 이미영씨와 최민종(가명·53)씨다. 다단계라면 그렇고 그런 사람이 했을 것이라 짐작하기 쉽지만, 이씨와 최씨 둘은 형사처벌을 받은 기록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1990년대 중반 서울 종로에서 보석 판매 일을 하다 서로 알게 된 사이인데, 이들 가운데 이씨는 오히려 보석 다단계에 발을 디뎠다가 크게 손해를 보고 나온 경험이 있다.

둘은 연인관계로 발전했고 최씨는 2008년 보석 관련 가게를 접고 온라인을 통한 보석 사업을 구상했다. 사업에 필요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짜기 위해 아는 사람이 하는 컴퓨터 회사를 찾았다가 사업 아이템을 ‘게임기 임대’로 바꾸었다. ‘미국에서 성인용 게임기를 사와서 임대를 놓으면 돈이 된다’는 컴퓨터 회사 대표의 말을 들은 이씨가 사업 방향을 틀었다. 그것도 ‘극적인’ 방향 전환이었다.

다단계 피해자였던 이씨가 구상한 건 게임기 임대를 통한 다단계 사업. 2008년 당시 이씨가 최씨에게 보낸 메일엔 “다단계는 3명 정도만 있으면 라인 깐다. 이런 일을 시작하게 해서 미안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들은 2009년 서울 대치동에 회사를 차리고 최씨가 대표, 이씨가 부대표를 맡았다. 직책은 대표, 부대표였지만 사실상 공동 운영자였다. 이씨와 함께 다단계 일을 했었던 과거 동료 2명이 직원으로 합류했다.

가장 절실한 건 ‘초반 흥행’이었다. 이씨는 보험사에서 잘 나간다는 설계사들을 끌어들였다. 당시엔 게임기 한 대 가격을 880만원으로 제시했는데, 게임기 한 대 팔 때마다 100여만 원의 수당을 준다고 꾀었다. 설계사들은 투자자 겸 판매자가 됐다. 현장 영업의 달인인 이들 덕에 처음에 투자자를 쉽게 불릴 수 있었다.

성광은 이들 설계사들을 판매자 직책의 가장 윗선인 본부장으로 앉혔다. 두터운 인맥으로 투자자를 여럿 데려온 군 장성 등에게도 본부장직을 줬다. 본부장 아래로 부장, 과장, 대리, 주임으로 이어지는 다단계 조직을 만들었다. 본부장 소속 본부에서 게임기를 팔 때마다 125만~140만원의 수당이 직급별도 지급되는 구조였는데, 이들에겐 수당 외 월급도 따로 챙겨줬다. 사업 후 1~2년 만에 투자자들이 쭉 늘어나기 시작했다.

[저작권 한국일보] 성광피라미드 사건 일지 _ 송정근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성광피라미드 사건 일지 _ 송정근 기자

◇투자자를 애태운 성광의 ‘밀당’

의심하는 투자자들이 아예 없었다거나, 최씨가 투자자들을 안심시킬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최씨는 2011년부터 1년에 한두 번씩 투자자들을 잔뜩 모아 미국 게임장에 데려 갔다. 최씨는 게임장을 가득 메운 수백, 수천 대의 게임기를 둘러보도록 했다. 또 미국에서 게임기를 구입했으며, 그에 따른 세금을 정상적으로 지급했음을 보여주는 ‘납세필증’이 붙은 계약서도 보여줬다. 어쩌면 이 게임기들이 진짜 투자자의 돈으로 사들인 것인지 조금만 더 자세히 캐물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열렬한 성광의 증인이 됐다. 사업의 성공을 확신한 이들은 누가 권하지 않아도 친척, 친구들을 끌어들였다. 성광은 급하게 굴지 않았다. 미국 수요만큼만 게임기를 팔 수 있으니 기다리라고 하기 일쑤였다. 이 ‘밀당’은 투자자들을 더 애타게 만들었다. 투자자들 사이에서 투자 경쟁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급기야 어떤 이들은 게임기가 나오는 대로 바로 투자해달라며 투자금을 아예 회사에다 맡기고 가기도 했다. ‘연수익 30%’는 그렇게 사람들을 마비시켰다.

성광 직원들이 일하는 모습. 성광은 월급을 받고 출근하는 직원과 월급을 받지 않는 부업 판매원으로 나뉜다. 과장급 이상은 회사의 실상을 알고 있었다.
성광 직원들이 일하는 모습. 성광은 월급을 받고 출근하는 직원과 월급을 받지 않는 부업 판매원으로 나뉜다. 과장급 이상은 회사의 실상을 알고 있었다.

성광은 철저히 수표와 현금으로만 거래했다. 투자금을 받을 때도, 수수료를 내줄 때도 철저히 수표와 현금만 썼다. 예컨대 성광이 A씨에게 수당을 내줄 일이 있으면 A씨를 유치한 과장 등에게 수표를 건네고, 과장은 본인 돈으로 A씨에게 입금하거나 아니면 직접 찾아가 수수료를 주는 식이었다. 혹시 있을 지 모를 수사 당국의 계좌 추적을 피하기 위해 가만히 놔둬도 자금 흐름이 복잡하게 꼬이도록 한 셈이다.

◇ 수수료 못 받을까봐 모두가 ‘쉬쉬’

그런데 이런 복잡한 자금 흐름은 성광 스스로에게 독이기도 했다. 2015년부터 투자자들 사이에서 ‘뭔가 좀 이상하다’는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분명히 내가 투자금으로 성광에다 낸 수표인데, 어느덧 내 수수료를 받고 보니 내가 낸 그 수표인 경우가 생기기도 한 것이다. 분명히 미국으로 건너가 게임기를 사는데 쓰여야 할 수표였는데 말이다. 하지만 아무도 문제 제기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투자기간이 3년으로 길다 보니 혹시라도 밉보여 투자금을 못 받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라는 게 신종선 수사관의 전언이다.

모두가 쉬쉬 하는 구조라 수사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관련된 신고나 사건이 단 한 건도 없었기 때문에 성광이라는 회사의 존재 조차 몰랐다. 그러다 2016년 한 정보원으로부터 첩보를 접했다. “100% 돌려 막기 구조가 아니라면 투자자들에게 매달 50만~60만원씩 일정하게 수익을 보전해 줄 수가 없다”는 점에서 불법 다단계 사건임을 확신했다. 하지만 뚫고 들어갈 지점이 마땅치 않았다. 수수료를 받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이들이 진술을 꺼렸기 때문이다. 성광은 사업설명회도 미리 시행한 신원조사를 통과한 사람들만 올 수 있도록 했다. 증거 모으기도 힘들었다. 신 수사관은 초조했다. 사건 관련자의 진술이나 증거 같은 게 있어야 영장을 발부받아 수사에 나설 수 있는데 접촉한 모든 사람들이 협조를 거부하니 틈이 없었다.

이런 상황이 뒤집힌 건 성광 내의 분쟁 때문이었다. 성광의 부사장과 본부장이 서로 다툰 뒤 이 본부장이 검찰에다 회사 실상을 제보한 것이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수사를 벌여 2017년 1월 곧바로 이씨를 구속했다. 경찰도 움직였다. 수사과정에서 얻은 피해자 진술을 토대로 압수수색 영장 등 20여 개 영장을 발부받아 성광의 회계장부 등 수사에 필요한 모든 자료를 확보했다. 이씨가 구속되던 날 최씨는 회사에 보관되어 있던 56억원을 들고 도주했다. 최씨는 넉 달 동안 추적을 피해 달아났으나 결국 경찰에 자수했다. 도피 기간 동안 최씨는 무려 15억원을 썼다.

성광이 투자자에 건넨 계약서 첫 장과 마지막 장에 첨부된 납세필증. 그럴싸해 보이지만 모두 가짜다.
성광이 투자자에 건넨 계약서 첫 장과 마지막 장에 첨부된 납세필증. 그럴싸해 보이지만 모두 가짜다.

◇성광이 토한 돈은 겨우 30억

압수한 성광의 장부는 예상대로 불법 다단계 장부 그대로였다. 투자자들로부터 들어온 투자금만 기록되어 있을 뿐, 이 돈이 투자 명목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거나 투자의 대가로 미국에서 넘어온 수익금이 있다던가 하는 흔적은 전혀 없었다. 오직 신규 투자자의 투자금만으로 기존 투자자들 수당을 돌려막기하고 있었다. 성광이 투자자로부터 받은 5,100억원대 투자금 가운데 진짜 미국으로 건너가 게임기를 사는데 쓰인 돈은 10억원 남짓이었다. 투자자들에게 자랑스럽게 내보인 계약서, 그리고 거기에 붙어 있는 납세필증은 그 때 얻은 몇 가지를 복사, 변조해서 여러 차례 돌려 쓴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아는 이들은 성광의 최고위 판매원 60명 정도였다. 신 수사관은 “다단계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사업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약 한 달만 일찍 체포영장을 받았더라도 피해규모를 1,000억원 정도 낮출 수 있었을 텐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하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성광의 공동운영자 이씨와 최씨는 특정경제범죄중처벌법상 사기 등 혐의로 각각 징역 14년과 16년 형이 확정됐다. 성광의 본부장 등 상위 직급 8명도 징역형을 받았다. 성광의 간부급 43명에게 유사수신행위규제법 위반 혐의를 추가, 검찰에 송치했다. 이들은 다음달부터 재판받는다. 5,000억 원대의 투자금을 굴린 성광이었지만, 정작 이들이 피해자 보상을 위해 내놓은 돈은 30억원이었다.

김동욱 기자 kdw128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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