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시 로먼은 미 항공우주국 NASA의 공간천문학 파트 원년 책임자로, 1960년대부터 근 20년간 우주망원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계획을 성사시켜 '허블의 어머니' 라 불리게 된 천문학자다. 그가 개척한 길을 따라 89년의 우주배경탐사선 코비와 2009년의 케플러 위성이 지구 궤도에 올랐다. 젠더 차별 때문에 과학자의 길을 사실상 포기해야 했던 그는 은퇴 후 여성 교육, 특히 어린 여성들의 과학자의 꿈을 북돋우는 데 헌신했다. Wikipedia.org

흔히 소수자 우대 정책(혹은 조치)으로 번역하는 ‘긍정적 조치 Affirmative Action’란 용어는, 현재적 차별 관행의 근절뿐 아니라 오랜 차별의 결과로서의 기울기까지 급진적으로 개선하려는 시도 일반을 가리킨다. 소수자의 집단 내 대표성을 제고하기 위해 교육 및 고용ㆍ승진 기회를 (역)차별적으로 보장하려는 조치들이 대표적인 예다. 1941년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시동을 걸고, 60년대 J.F.케네디와 존슨 민주당 정부가 행정명령을 통해 그런 정책을 본격화하면서 저 개념이 정립됐다. 그들이 겨냥한 차별 범주는 인종ㆍ이념ㆍ피부색ㆍ출신국가였고, 첫 대상은 연방 정부 및 정부 계약업체였다. 차별 업체에는 계약 해지 등 불이익을, 다양성 제고에 적극적인 업체에는 혜택을 부여했다.

저 범주에 ‘젠더’를 처음 포함시킨 건 케네디였다. 그는 취임 첫해인 61년 12월 대통령 직속 여성지위(향상)위원회(CSW)를 설립하고 초대 위원장에 엘리너 루스벨트를 임명했다. 이듬해 6월 미국 전역에 TV로 방영된 엘리너의 백악관 인터뷰에서 케네디는 CSW 설립 취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위대한 사회를 향한 여정에서, 우리는 여성들이 가정에서의 주된 책임을 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민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더 효율적으로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케네디의 저 말과 기울어진 젠더 의식이 제대로 도마에 오른 건 한참 뒤였고, 그건 어쩌면 시대적 한계였을지 모른다.

미국의 모든 주가 여성의 배심원 자격을 인정한 건 73년부터였고, 기혼 여성이 남편 동의 없이 신용카드를 가지게 된 것도 74년 ‘신용평등법(ECOA)’ 이후였다. 아이비리그의 예일과 프린스턴 대학은 1970년에야 여성 입학을 허용했고, 하버드는 77년 레드클리프 여대와 통합한 뒤부터 남녀공학이 됐고, 콜럼비아대는 1982년에야 여학생의 입학 원서를 받았다. 1963년 CSW 보고서에 따르면 여성의 평균 급여는 남성의 59% 수준이었고, 취업 제한 등 기회의 차별은 더 심해 인종ㆍ젠더 차별을 금한 1964년의 시민권법이 시행된 뒤로도 아주 더디게 개선됐다. 전미여성협회(NOW)가 출범한 건 1966년이었다.(cnn.com)

1959년, 출범 6개월 된 미 항공우주국(NASA)의 공간천문학 분과 책임자로 34세 천문학자 낸시 로먼(Nancy G. Roman)이 취임했다. 공간천문학(space astronomy)은 지상이 아닌 우주공간에서 대기 간섭 없이 천체를 관측하기 위해 신설된 부서. 상대적으로 힘 없는 파트이긴 했지만, 또 그가 1953년 NASA 전신인 국가항공자문위원회(NACA) 시절부터 일한 영화 ‘히든 피겨스’의 수학자 캐서린 존슨(Katherine Johnson, 1918~)과 달리 백인이긴 했지만, 당시 여성으로선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는 1979년 은퇴할 때까지 만 19년을 재직하며 NASA 최초 여성 임원이 됐고, 대기권 바깥 궤도를 도는 수많은 관측위성의 길을 직ㆍ간접적으로 개척했다. 대표적인 게 NASA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프로젝트 중 하나로 꼽히는 허블 우주망원경이었다. 그래서 그를 ‘허블의 어머니’라 부르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소책자 한 권 분량인 위키피디아 허블 망원경 항목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는 허블의 ‘히든 피겨스’이기도 했다. 낸시 로먼이 2018년 12월 26일 별세했다. 향년 93세..

낸시 로먼은 1925년 5월 16일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음악교사 어머니와 지질학자 아버지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지질조사국 직원으로 석유ㆍ석탄 등 광맥 탐사 일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그의 가족은 로먼 생후 3개월 무렵부터 오클라호마 텍사스 뉴저지 미시건 네바다 등지를 옮겨 다니며 살았고, 로먼은 격변의 환경보다 하늘의 항성을 이웃처럼 여겼다.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집은 대개 도심이 아닌 불빛 드문 시골이었고, 어머니는 어린 그와 함께 밤 하늘을 보는 걸 즐겼다고 한다. 그는 시에라네바다 산맥 기슭 마을 리노(Reno)에 살던 11살 무렵 친구들과 천문관측 동아리를 꾸려 매주 한 차례씩 별자리를 찾곤 했다고 한다. 볼티모어 고교 재학시절 천체물리학자가 되고 싶어 5학년 과정의 라틴어 대신 2학년 과정 대수학을 신청하자, 진로상담 교사가 “‘여자가 무슨 수학이냐”는 표정으로 비웃더라”고, “(살아오는 동안) 내가 겪은 (세상의) 태도가 대체로 그러했다”고, 그는 훗날 인터뷰에서 말했다. 당시 그는 천문학자가 못 되면 고교에서 물리학이나 수학을 가르치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space.com) 그는 여성이 진학할 수 있는 대학 가운데 천문학 분야에서 가장 나아 보였던 펜실베이니아 스와스모어대에 진학했다. 3학년 무렵 물리학과장이 그에게 “내가 여학생에겐 웬만하면 물리학 포기하라고 하는데, 너는 어쩌면 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한 말이 자신이 들은 첫 격려였다고 말했다. 시카고대 대학원에 진학해서는 논문 지도교수가 약 6개월간 그에게 말도 붙이지 않더라고 했다. 하지만 49년 박사 학위를 받은 그에게 학교에 남아 자신의 연구를 도와달라고 붙잡은 것도 바로 그 교수였다고 한다. 그는 6년간 강사 겸 연구교수로 재직하며 위스콘신의 여크스(Yerkes) 천문대 등서 연구했다. 19세기 말 시작된 별의 스펙트럼 분석 기법(분광학)은 그 무렵 영국 출신의 개척자적 여성 천체물리학자 세실리아 페인(1900~1979)의 태양성분 분석 등으로 각광받던 분야였고, 2차 대전 이후 군사 레이더 기술의 발전으로 전파천문학이 우주 관측 및 측지분야에서 본격적으로 개척되던 때였다. 시카고대 시절인 50년대 그는 쌍성계 ‘AG드라코니스’를 발견해 스펙트럼 분석으로 공전주기를 확인했고, 항성들의 구성성분이 공전 속도 및 은하 궤도상의 위치와 관련이 있으며, 중심부와 가장자리의 별의 나이가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해 논문을 발표했다.

다시 말해 그는 주목 받는 젊은 천문학자였지만, 스스로 보건대 종신 교수가 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천문학 분야를 통틀어 여성이 연구자로서 안정적 지위를 보장받은 예가 없었다”고 그는 훗날 내셔널지오그래픽 인터뷰에서 말했다. 워싱턴D.C의 해군연구소로 옮긴 뒤로도 연구소 동료들이 한동안 그에게 아예 역할을 주지 않더라는 이야기, 그들의 신임을 얻기 위해 더 열심히 해야 했다는 이야기를 그는 저 인터뷰와 2016년 사이언스지 에세이에 썼다.

그래서 선택한 게 NASA였고, 그의 직위는 연구하는 자리라기보다 연구를 지원하는 자리였다. 그는 “당시 그 직책을 맡는다는 건 더 이상 내 연구를 못 한다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향후 수십 년간 천문학 분야에 영향을 미칠 새로운 분야를 처음부터 구축한다는 도전적 의미는 뿌리치기 힘들 만큼 매력적이었다”고 말했다.(solarsystem.nasa.gov)

로먼은 50년대 여성 천문학자로서 대학에서 안정적 지위를 얻을 가망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선택한 게 해군연구소였고 갓 출범한 NASA였다. 태양공전관측위성(OSO)의 모형을 설명하는 1962년의 낸시 로먼. nasa.gov

NASA가 1957년의 ‘스푸트니크 쇼크’, 즉 소련의 첫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발사 성공에 자극 받아 출범한 만큼, 백악관과 예산을 쥔 정치인들이 NASA에 주문한 건 미국의 항공우주기술이 한 수 위임을 과시하는 거였다. 대표적인 게 달 유인탐사 같은 이벤트였다. 2007년 노벨물리학상을 탄 입자물리학자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는 “국제우주정거장은 ‘궤도를 도는 쓰레기(orbital turkey)’이며 유인 우주탐사 계획도 과학적으로 거의 쓸모 없이 국민 세금만 축내는 낭비”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와인버그처럼 말하진 못했겠지만, NASA 초기에도 ‘이벤트’에 예산을 쏟아 붓는 걸 못마땅해 하던 과학자들이 없지 않았다.

로먼의 관측 파트는 머큐리-제미니-아폴로-스카이랩-우주왕복선 계획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주류 프로젝트들에 밀려 정치인과 시민들에게 어필하기 힘든 분야였다. 그 틈바구니에서, 그는 3기의 태양공전관찰위성(OSO)을 비롯 가시광선 바깥의 전파의 에너지 적외선 중력시험을 위한 소형 천문위성 등을 쏘아 올렸다. 62년 그가 천체물리학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입안한 초대형우주광학망원경 허블 프로젝트는 당시 천문학자들의 숙원이었지만, 계획 단계의 첫 예산안 15억 달러는 당시 기준으로 “모든 미국 시민에게 극장 티켓을 한 장씩 나눠줄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기술적 난관은 접어두더라도 효용 역시 누구도 장담할 수 있는 프로젝트였다.

그는 의회를 설득하고, 천문학자들을 조직해 청원운동을 주도하고 대중 강연 등을 통해 시민들에게 우주망원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주 렌즈의 직경을 줄이고, 비용 일부를 유럽우주기구(ESA)가 분담하는 등 숱한 곡절 끝에 미 의회는 1978년에야 3,600만 달러의 첫 예산안을 승인했고, 이듬해 낸시 로먼은 NASA를 떠났다. 수 차례 설계 수정 발사 연기 등을 거쳐 허블망원경은 90년 5월 지구 저궤도에 올려졌고, 인류는 대기 간섭 없이 우주를 들여다볼 수 있는 밝고 선명한 눈을 비로소 얻게 됐다.

허블 망원경은 지금까지 약 30년을 활약하며, 역대 어느 지상 천문대나 우주왕복선도 보여주지 못한, 가장 멀고 깊고 오래된 우주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세계인에게 펼쳐 보였고, 2만여 건(학술지 게재 기준)에 달하는 논문의 데이터를 제공해왔다. 아인슈타인이 수학적으로 예측한 중력렌즈현상을 입증했고, 우주 가속팽창의 증거를 제시했고. 우주팽창속도(허블상수)를 정밀화해 우주의 나이(약 138억년)을 알게 하는 데 힘을 보탰고, 빅뱅 직후 초기 우주의 모습(Deep Field Project)을 맛보게 했다.

하지만 로먼은, 사실 허블 발사 성공 직후에도 이미 잊힌 존재였다. 그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건 후임 공간천문학 분과장이던 에드워드 웨일러(Edward Weiler, 1979~1998 재직)였다. 그는 허블 발사 직후 인터뷰에서 “라이먼 스피츠(Lyman Spitzer, 1946년 우주망원경 개념을 처음 제안한 천문학자)를 허블의 아버지라고 한다면, 허블의 어머니는 낸시 로먼”(WP)이라고 말했다. 웨일러는 2011년 VOA 인터뷰에서 “인터넷도 구글도 이메일도 없는 그 시절에, 허블 우주망원경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천문학자들을 조직화하고 의회를 설득한 게 낸시였다”(NYT)고 말했고, “그는 타고난 책략가(real schemer)였다. (…) 그의 리더십과 불굴의 의지, 정치적 감각이 없었다면 허블도 없었을지 모른다”(National Geographic)고도 말했다.

지난해 10월 NASA는 허블의 위치제어장비(gyroscopes) 6개 중 4개가 고장 나 주요 관측이 사실상 불가능해지면서 '안전모드(safe mode)'로 전환했다고 발표했다. 목표 수명(15년)을 넘겨 28년을 활약하는 동안 허블은 총 5회 부품 교체 등 수리를 받았고 이번에도 NASA는 해법을 강구 중이라고 밝혔지만,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고 한다. NASA

허블은 발사 당시 주 렌즈 구면수차 오류 때문에 당초 기대한 고해상도 관측이 불가능했고, 3년 뒤 유인우주선의 교정 작업을 거친 뒤에야 제 기능을 발휘했다. 그 반전의 드라마를 멀찍이서 지켜봤을 로먼은 2012년 NASA의 한 대중 강연에서 “오류 당시엔 잠깐 내가 너무 ‘허블’을 팔았나 싶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내 내가 옳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고 농담처럼 말했다.(nasa.gov)

뉴욕타임스 등 일부 부고에는 로먼이 1989년의 우주배경탐사위성(COBE) 프로젝트에도 기여한 것으로 소개돼 있지만, 사실 그건 그의 흑역사라 해야 할 것이다. 코비 프로젝트는, 그가 아니라 직원이던 여성 천문학자 낸시 보게스(Nancy Boggess)의 “설득과 추진력”(‘빅뱅의 메아리’ 이강환 지음) 덕이었고, 로먼은 오히려 보게스의 고집을 가장 완강하게 저지했던 훼방꾼 중 한 명이었다. 보게스는 로먼이 잠깐 부서를 옮긴 틈을 타 새로운 부서장을 설득해 저 계획을 성사시켰고, 이후 코비 연구팀의 일원으로서 2006년 존 메더(John Mether)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에 기여했다.

로먼은 은퇴 후 허블망원경 지상제어센터인 고다드우주비행센터의 자문역과 항공우주산업체 컨설턴트로 일하며 각종 강연에 초대받아 자신이 살아온 시대와 여성과학자로서의 삶, 허블 망원경에 얽힌 경험 등을 들려주곤 했다. 그는 80대인 90년대 말까지 워싱턴D.C의 세퍼드 초등학교에서 천문학을 가르쳤고, 특히 어린 여성들이 큰 꿈을 꿀 수 있도록 격려하곤 했다. 그는 그와 같은 이력의 삶을 살고 싶다는 젊은 여성들에게 “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두라”고, “박사학위를 받은 뒤 내가 선택한 직업들은 당시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여성에겐) 아예 주어지지 않던 일이고 기회였다.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새로운 기회들이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2015년 90세의 그는 여성 과학ㆍ기술자들이 NASA에서 약진하는 게 무척 행복하다며 다만 두 가지, 여성의 평균 급여가 아직 남자의 85%에 불과하고, 전체 여성 비율 특히 고위직 여성 숫자가 적은 것은 여전히 문제라고 말했다.(space.com)

그는 “내가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이유 중 하나는 여성들도 과학자가 될 수 있고, 과학이 재미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그도 ‘허블의 어머니’라는 값진 타이틀보다, 어쩌면 여성 천문학자로 기억되길 원했을지 모른다. 그는 자신의 이력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20대 연구원 시절 과학자로서 성취를 이뤄가던 때라고 말했다.

레고사가 2017년 출시한 'NASA의 여성들' 시리즈. 왼쪽부터 낸시 로먼, 메이 제미슨, 마거릿 해밀턴. 캐서린 존슨까지 모두 다섯이다.

NASA는 2011년 그의 이름을 붙인 ‘낸시 그레이스 로먼 테크놀러지 펠로십’을 신설했다. 2017년 장난감업체 레고사는 ‘NASA의 여성들’ 세트의 주인공으로, 아폴로 11호의 궤도 소프트웨어를 설계한 MIT의 컴퓨터공학자 마거릿 해밀턴(Margaret Hamilton, 1936~)과 물리학자겸 여성 최초 우주비행사 샐리 라이드(Sally Ride, 1951~2012), 의대 출신 공학자로 훗날 스타트랙에도 출연한 첫 흑인 우주비행사 메이 제미슨(Mae Jamison, 1956~), 히든 피겨스의 캐서린 존슨(영화 개봉 이후 추가)과 함께, 폭발하는 초신성을 배경으로 허블 곁에 선 낸시 로먼을 제작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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