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박자박 소읍탐방]달콤 쌉싸름한 ‘해국길’의 추억, 경주 감포읍 
송대말등대에서 내려다본 경주 감포항 방파제 등대. 두 면을 감은사지 삼층석탑 문양으로 뚫어 그 사이로 바다가 보이게 했다. 방파제 출입을 금지해 가까이 갈 수 없어 아쉽다. 경주=최흥수기자

경주에 바다가 있느냐고 묻는 이들도 문무대왕암, 부채꼴 주상절리 등을 대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석굴암, 불국사, 경주남산과 왕릉 등 천년고도 신라 유적이 대부분 내륙에 위치하기 때문에 경주 바다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감포읍, 양북면, 양남면이 동해와 접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감포는 1937년 제물포와 함께 읍으로 승격한 지역의 중심 항구다.

 ◇해국처럼 달콤쌉싸름한 ‘감포깍지길’ 

참가자미 회를 가운데 두고 멸치볶음, 톳과 미역줄기무침, 꽁치와 가자미 구이 등 바다 내음 물씬 풍기는 밥상이 차려졌다. 푸성귀로는 시금치무침과 얼갈이배추 찜이 나왔다. 함께 쌈 싸 먹을 자작하게 졸인 된장을 내놓으며 식당 주인 신경희씨는 손님에게 왜 예약 시간보다 늦었냐고 타박이다. 무슨 음식이든 금방 요리해 상에 올려야 가장 맛있다는 철칙을 30분이나 어기게 됐기 때문이다. 감포항 어판장 뒤편 ‘주주(酒主)총회’ 식당은 게장이나 새우장, 밥식해(오징어, 가자미, 고둥 같은 생선과 밥알을 버무려 숙성시킨 지역 음식) 등 시간이 만드는 음식을 제외하면 밑반찬도 예약 시간에 맞춰 조리한다. 밥과 국도 마찬가지다. 간판에 전화번호조차 쓰지 않고 예약 손님만 받는 자신감의 바탕이다. 아는 사람들 위주로 장사를 한다는 것도 큰 이유다. 모르는 사람도 직접 방문해 예약할 수 있지만, 한 번에 2~3팀만 받기 때문에 거절당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

바다내음 가득한 ‘주주총회’ 식당의 밥상. 지인들 위주로 예약 받는 동네 식당이자 술집이다.
아는 사람들 위주로 장사하기 때문에 식당에 전화번호가 없다.

경주 최대 항구인 감포항은 다른 바닷가 관광지에 비하면 여행자에게 그리 곰살맞지 않다. 포구 뒤편 2차선 도로는 양편으로 주차한 차량에 자리를 내주어 마주 오는 차와 겨우 피해가야 할 정도로 불편하다. 항구가 코앞이지만 바다 전망의 깔끔한 카페보다 허름한 가옥에 뱃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다방이 훨씬 많다. 가자미와 멸치가 유명하다지만 강구의 대게, 구룡포의 과메기처럼 특화된 정도는 아니다.

감포의 바다와 산을 연결한 ‘감포깍지길’도 마찬가지다. “관광객보다 지역에 사는 사람이 먼저 행복해야죠. 코스도 경치 좋은 걸 먼저 따지지 않고 마을을 고루 연결하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길을 단장하는 과정에서 서로 유대감을 느끼고 이익을 나눌 수 있도록, 주민들의 참여를 끌어내려고 했지요.” 2011년 깍지길을 개설하는 데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감포 토박이 서삼란씨의 회고다.

깍지는 열손가락을 서로 엇갈리게 바짝 잡은 상태, ‘손깍지’를 의미한다. 가족 간에는 친밀감을 높이고, 연인끼리는 두근대는 온기를 주고 받으며 두 손 꼭 잡고 걷는 길이다. 7개 코스 중 제4코스 일부가 감포 읍내 좁은 골목을 통과한다. 감포 공설시장에서 도로 맞은편 고샅으로 접어들면 두 사람이 겨우 비껴갈 정도로 좁은 길이 이어진다.

낡은 담장에 보랏빛 해국이 그려진 감포깍지길 4구간.
감포제일교회로 오르는 계단의 해국 그림.
감포깍지길 4코스 해국길의 좁은 골목. 오른쪽 건물이 ‘아르볼’ 카페다.
떠돌이를 자처하는 최선호 ‘아르볼’ 카페 사장이 커피를 내리고 있다. 4~5명 앉을 자리에 테이블이 하나 밖에 없는 작은 카페다.

초입부터 달콤한 포구 감포(甘浦)에 쌉싸름한 국화 향이 번진다. 검버섯처럼 세월의 때가 밴 시멘트 담장을 보랏빛 해국 그림이 화사하게 장식하고 있다. 바닷가 비탈진 바위틈에 소담스럽게 피어나는 꽃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요란하지 않다. 특별히 외지 손님을 의식하지 않고, 어두침침한 동네 분위기를 조금 밝게 해 보자는 수준이다. 그나마 포구에서 감포제일교회로 오르는 계단의 해국은 제법 크고 풍성하게 그려졌다. 계단 중간에는 ‘아르볼(Arbol)’이라는 카페가 둥지를 틀었다. 스페인어로 ‘나무’라는 뜻의 이국적 이름이지만, 테이블이 단 하나뿐인 소박한 모습이 좁은 골목과 잘 어울린다. 작은 종탑과 교회가 들어선 자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종교시설이 있던 곳이다. 아직 마당 한쪽에 일본식 산당(山堂)이 남아 있다. 감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은 아름다운 벚꽃 동산으로 기억한다는데, 광복 이후 모두 잘려나가고 지금은 벚나무가 한 그루만 남았다.

감포제일교회 마당 한쪽에 남아 있는 일본식 신당.
감포읍내에서 가장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일본식 주택 ‘다물은집’.
읍내 중심가에도 일제강점기에 지은 집들이 외형을 유지하고 있다.
일부 오래된 주택은 조그만 충격에도 허물어질 듯 낡았다.

요즘 어떤 국회의원의 부동산 투기 논란으로 관심을 모은 목포만큼은 아니지만, 감포에도 일제강점기에 지은 건물들이 꽤 남아 있다. 읍내를 관통하는 주 도로인 ‘감포로’ 좌우엔 오랜 세월에 변형되긴 했어도 기본 틀을 짐작할 수 있는 일본식 건물이 줄지어 있다. 그중에서도 골목 안쪽의 ‘다물은집’은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한 집이다. ‘다시 찾은 집’이라는 의미의 2층 집에는 현재 ‘옛골 설렁탕’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민족적 감정을 한 꺼풀 걷어내면,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인생살이의 애환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듯하다. 수필가 주인석은 스토리 에세이 ‘감포깍지길’(도서출판 그루)에서 주민들에게 들은 ‘다물은집’에 얽힌 두 일본인 이야기를 기록해 놓았다. 점심을 굶어야 했던 열 살 소년 가장에게 다른 아이들 모르게 매일 도시락을 싸 준 소학교 교사 야스모토는 김흥덕씨에게 평생 갚아야 할 ‘벤또 빚’을 안긴 선생님으로 기억된다. 조선인 남성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멸시를 당해 일본에서 감포로 이주했지만, 감포에서도 똑같은 설움을 겪고 결국 아이를 안고 마을을 떠나야 했던 다카수키는 남편 종무의 친구에게 ‘겨울하늘’처럼 헛헛한 기억으로 남았다. 세월의 묵은 때가 벗겨지고 다시 쌓인 낡은 집 한쪽 귀퉁이를 두드리면, 아련하고 서러운 또 다른 이야기들이 먼지처럼 우수수 떨어질 듯하다.

 ◇감포 최대 유원지 솔숲 언덕 송대말등대 

감포항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북측 언덕에는 송대말등대가 바다를 비추고 있다. 송대말(松臺末)은 마을 이름이 아니라 ‘소나무가 펼쳐진 끝자락’이란 뜻이다. 바다로 길쭉하게 돌출된 언덕 끝에 수령 200~300년 된 아름드리 해송이 숲을 이루고 있다. 감포항 인근은 암초 지대여서 해난사고가 빈번했다. 일제강점기 암초 위치를 표시하는 시설이 있던 자리에 1955년 무인등대가 설치됐고, 1964년엔 광력을 증강하고 유인등대로 전환했다. 2001년엔 기존 등대 옆에 한옥 지붕에 ‘감은사지 3층 석탑’을 올린 모습의 새 등대를 건립하면서 옛 송대말등대는 외형만 남았다.

감포항 북측 송대말 등대. 오른쪽 등대는 더 이상 운영하지 않고, 왼쪽 감은사지 석탑 모양의 등대만 불을 밝힌다.
송대말에서 내려다본 감포항 방파제 등대. 역시 감은사지 삼층석탑 모형으로 디자인했다.
송대말등대에서 내려다본 감포항 풍경.
송대말등대 바로 앞 암초를 막아 만든 수족관.

송대말에서 내려다보는 감포항 방파제의 등대 2개도 감은사지 3층 석탑을 입고 있다. 두 면에 석탑 형상을 음각해 등대 사이로 바다가 보인다. 석탑을 어설프게 흉내 낸 송대말등대보다 오히려 돋보인다.

송대말에서 바로 아래로 내려다보면 거친 암석을 논두렁처럼 연결한 수족관이 보인다. 잡은 물고기를 가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건져 즉석 해산물 요리를 즐길 목적으로 만든 시설이다. 일제강점기에 송대말에는 일본인 고관과 지역 유지들을 상대로 하는 고급 요정(송대정과 화양정)이 있었다. 일본인 여급을 두고 전용 택시까지 운영했을 정도였다고 하니 송대말은 감포 최고 부자들을 위한 유원지였다. 감포 향토사연구회는 감포에 이처럼 일본인 ‘알부자’들이 모인 이유를 경주의 신라문화재를 도굴해 ‘조용하게’ 밀반출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여겼기 때문으로 해석하고 있다. 조선총독부에서 허가한 경상북도의 저인망어선 13척 중 8척을 감포에 배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거마장 마을 앞 가자미를 널어 말리는 모습.
귀하다는 동해 명태도 많이 잡히나 싶었는데 러시아산이라고….
과메기를 말리는 모습. 감포항은 경주 최대 항구지만 특화된 어종이 없어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감포항 해상공원의 아침 풍경. 해돋이를 보러 나왔지만 안타깝게도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감포항~전촌항 산책로의 해식동굴.

감포항 남측 거마장(居馬場) 해변에서 전촌항으로 발길을 옮기면 포구의 들뜬 모습과는 사뭇 다른 한적함을 즐길 수 있다. 깔끔하게 정비한 감포해상공원을 벗어나면 잠시 짭조름한 바다 내음에 취한다. 바다와 접한 마을 길에 명태, 가자미, 과메기, 멸치를 말리는 시설이 놓여 있다. 이곳에서 전촌항까지는 해안을 따라 걷기길이 나 있다. 중간쯤에 ‘용굴’이라는 해식동굴이 자랑거리인데, 규모에 비하면 이름이 과장됐다. 오히려 산비탈을 빼곡하게 덮은 해국의 정취가 그만이다. 이 겨울에도 날려 보내지 못한 열매가 몽글몽글 뭉쳐 있는 모습에서 쪽빛 바다와 어울린 보랏빛 해국의 자태를 상상하는 게 어렵지 않다. 전촌항 주차장에는 말 형상의 조각이 높이 걸려 있다. 신라시대에 있었다는 인근 말 목장을 기념하는 조각이다.

경주=글ㆍ사진 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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