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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기자는 괴로워

입력
2019.01.16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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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반평생 기자질을 했다. 30년간 한 신문사 밥을 먹었다. 기자가 도매금으로 ‘기레기’로 불리기도 하는 요즘, 나는 마음 아프다. 이 불신은 온당한가? 기자란 도대체 무슨 존재인가?

우리말에는 접미사 ‘질’이 붙은 단어가 적지 않다. 삽질, 걸레질, 바느질은 좋다. 그런데 선생질, 기자질, 목수질, 도둑질, 노름질, 싸움질, 고자질, 계집질, 서방질, 갑질도 있다. 국어사전은 ‘질’에 대해 ‘어떤 직업을 낮잡아 부르거나 옳지 않은 일을 이를 때’ 붙인다고 설명한다. 그럼 선생질과 기자질은? 현역 시절 지치고 힘들 때 나도 곧잘 “이 놈의 기자질 정말 때려치워야지”라고 중얼거리곤 했다. 제 직업에 ‘질’을 붙이는 건, 사회가 요구하는 그 직업의 척도에 스스로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 자조이거나, 직업에 회의를 가져서이거나, 또는 겸양이다.

직업에는 보통 ‘사(士, 師, 事)’자나 ‘가(家)’, ‘자(者)’, ‘인(人)’, ‘원(員)’, ‘부(夫)’ 자가 붙는다. 판ㆍ검사(判ㆍ檢事), 변호사(辯護士), 의사(醫師)에서 보듯 ‘사’자는 한자로는 각기 달라도 선망의 전문직 직업군이다. 작가, 화가, 기업가, 발명가처럼 ‘가(家)’자는 대체로 일가견을 이룬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기자(記者)는 나름 전문직 영역이긴 한데 왜 ‘놈 자’를 쓰는 걸까.

기자는 기사를 잘 쓰든 못 쓰든 욕을 먹는 놈이니 그렇다고 기자들은 우스개로 말한다. 나는 그 해석에 동조하고 싶다. ‘기자질’과 ‘기자’는 자조와 긍지가 묘하게 뒤섞인 말이다.

요즘 누구보다 가장 그랬을 사람은 그 기자일 게다. 지난주 문재인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에서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왔습니까”라고 질문한 경기도의 한 방송사 기자 말이다. 그는 그날 질문자로 운 좋게 지명받을 때까지 자신이 기자의 표상, 또는 기레기의 전형으로 양극단에 서게 되리라고 눈곱만큼이나 생각했을까. 내로라하는 여야 정치인들에게서 “술 한잔 먹고 푸념할 때나 하는 얘기, 싸가지는 고사하고 실력이 없는 기자”로 모욕을 당하거나, “국민의 답답한 가슴을 뻥 뚫어준 사이다 질문,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기자”로 추앙받을 일이 생기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나중에 그 기자가 자신의 진의를 밝혔지만 세간의 상반된 반응은 그 기자의 의도와 전혀 무관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기자회견을 본방사수했다. 기자도 할 만한 질문을 잘 했고, 문 대통령도 당돌하게 들릴 수도 있는 질문에 잘 응답했다고 봤다. 어차피 타운홀 방식의 기자회견을 가진 건 누가 뭘 물어도 된다는 대통령의 자신감에서 나온 거 아닌가.

그런데? 인터뷰이의 답변과 태도를 문제 삼는다면 혹 몰라도, 인터뷰어의 질문과 태도를 문제 삼은 일이 벌어졌다. 본말전도다. 기자는 대통령직(presidency)에게 질문한 것이지, 대통령 개인(president)에게 질문한 게 아니다. 교과서적인 말을 빌리면 언론은 국민이 위탁한 질문자다. 그건 민주주의 공통의 헌법 정신이다. 그래서 질문을 제대로 못하는 기자야말로 직무유기다.

견습기자 시절, 선배에게 “훌륭한 기자는 어떤 기자입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다. 하늘 같은 선배 기자 왈 “질문을 잘 하는 사람이지.” 그때는 잘 몰랐다. 기자의 내공이 좀 쌓인 후에야 깨달았다. 기자는 잘 쓰는 자가 아니라, 잘 묻는 자여야 한다는 걸. 그런데 권력과 기자는 결코 친해질 수 없는, 친해져서도 안 되는 숙명이니까 권력자에겐 좀 더 차가운 온도로 물어야 한다. 예절의 문제가 아니다. 정작 질문을 받은 대통령은 가만히 있는데, 수호 천사와 무임 승차꾼들이 너무 많았다. 신상까지 털린 그 기자는 여전히 혼란스러울까. 내가 질문을 잘한 걸까, 못한 걸까.

한기봉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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