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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사기꾼 사기치는 트럼프 협상술

입력
2018.12.16 19:00
수정
2018.12.26 10:47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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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완서 작가의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는 6ㆍ25 전쟁 참상이 묘사되어 있다. 거기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1ㆍ4후퇴 때 서울에 남게 된 작가 가족이 국군의 서울 재탈환을 앞두고 북한 정권의 북송 명령을 받은 상황이다.

“식권은 이를 테면 양곡권 같은 건데, 가다가 아무 집에서나 묵는 집에서 그걸 떼 주면 우리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그만큼의 양곡은 되돌려 받게 돼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조선 피난민들처럼 양곡을 이고 지고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꿈 같은 얘기였다. 그들이 입성한 지 두 달여 만에 처음으로 접해 본 식량정책은 이렇듯 쌀 한 톨 구경 안 시키고도 흰소리칠 수 있는 환상적인 것이었다. (중략) 그러나 그걸로 정말 밥을 타 먹을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식권의 권위를 믿지 못하는 우리의 피난 짐은 아무래도 올망졸망한 곡식 자루가 무게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쌀밥에 고깃국 먹이겠다’는 북한 정권 약속이 아주 오래된 사기라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런 일을 직접 겪었거나, 가까이서 전해들은 세대가 북한을 유난히 불신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들 중 많은 이들은 ‘1년 안에 비핵화를 하겠다’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약속했다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사기꾼’으로 여긴다.

직접 당해보기도 했지만, 사기꾼에게 제대로 걸리면 한창 사기극이 진행되어도 피해자는 그걸 모른다. 옆에서 경고해도 모른다. 오히려 사기꾼을 감싼다. 사기꾼을 비판하는 사람을 공격한다. 상황이 악화되어도, 속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더욱 사기꾼에게 매달리기도 한다. 하지만 사기꾼들은 피해자의 믿음과 신의를 이용할 뿐이다.

북한 비핵화 협상이 겉돌면서 이번에도 북한에 당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 동안 문재인 정부는 북한에 정권의 명운을 건 행보를 보여왔다. 미국이나 국내 전문가들의 부정적 전망을 괜한 어깃장 정도로 치부했다. 북한 고위인사가 냉면이니 목구멍이니 하는 험한 말을 해도 문제삼지 않았다. 산업재해, 해난사고, 자연재해, 시위 도중 숨진 분들의 인권을 꼼꼼히 챙기다가도 북한 인권만은 외면했다.

정권의 후원 아래 장밋빛 전망도 쏟아졌다. 적폐청산이 확실하게 이뤄진 지상파 뉴스와 보도채널은 지난 주까지 김 위원장 답방이 곧 성사될 것처럼 분위기를 띄웠다. 북한 매체가 ‘남조선에서 장군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고 보도할 정도였다.

소중한 기회를 버릴 수 없다는 이유로 정부도 정책추진에서 편법을 용인했다. 뒤늦은 북한 석탄 밀반입 대응, 철도협력 등 대북 접근에 속도를 내다가 여러 차례 미국 제지를 받았다. 북한을 ‘비정상 국가’라고 지칭한 방송 진행자에 규제를 가했다는 말도 들린다. 중앙아시아 개도국과의 농업협력 사업지원을 신청했더니, ‘북한에 언제 대규모 농업 지원이 이뤄질지 모른다’며 기다리라는 응답을 받았다는 얘기도 있다.

북한에 당할 가능성이 낮다는 측면에서 보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접근법에 신뢰가 간다. 북한이 관영매체로 비난하자, 지난 주말에도 “급할 것 없다”며 비핵화 조치를 먼저 취하라고 응수했다. 사기꾼을 상대로 역으로 사기치는 사람 같다. 돈 꿔달라는 사기꾼에게 먼저 보따리를 내어 놓으라는 격이다. 사실 그는 한국 기준으로는 반 사기꾼에 가깝다. 부동산 투자실패로 회사를 몇 번이나 말아먹고 회생절차를 밟았다. 그래서 사람 말을 온전히 믿을 수 없다는 걸 아는 모양이다.

통일도 좋고 평화도 좋다. 그러나 1년이면 된다던 비핵화가 아직 첫발도 못 내밀었다면, ‘혹시나?’ 하는 의심과 함께 ‘플랜 B’도 생각해야 한다. 답방을 요청하는 대신, 문 대통령은 김 위원장에게 ‘나를 믿고 과감한 비핵화 의지를 먼저 보여달라’고 설득해야 할 시점이다.

조철환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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