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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과 베트남의 미묘한 삼각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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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과 베트남의 미묘한 삼각관계

입력
2018.12.15 10:06
수정
2018.12.15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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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 韓 빼앗길까… ‘옛사랑’ 北구애 부담스런 베트남

문재인 대통령이 6일 청와대에서 방한한 응우옌 티 낌 응언 베트남 국회의장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6일 청와대에서 방한한 응우옌 티 낌 응언 베트남 국회의장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악연과 혈맹이 흐릿해지는 데에 반세기 시간이면 충분한 모양이다. 베트남한테 남북한이 그렇다. 60, 70년대 이념전(戰) 당시 미국을 편들며 자국민을 해친 남한이 함께 싸워준 북한보다 지금은 훨씬 더 가깝다. 어차피 변심은 과거와의 작별이고, 고통 없이는 오지 않는 미래도 있는 법이다. 못살던 시절 연인이 다시 구애 중이다. 심지어 한창 사랑이 깊어지고 있는 지금 애인을, 어쩌면 데려갈지도 모를 위험한 존재다. 한반도 해빙이 베트남은 불편하다.

러브콜

올 들어 한반도 남과 북의 ‘러브콜’이 동시에 향하고 있는 곳이 베트남이다. 일단 명실상부 베트남은 문재인 정부가 추진 중인 신(新)남방정책의 ‘핵심 파트너’다. 14일 외교부에 따르면 대한(對韓) 교역액의 경우 2010년에 13.3%던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ㆍ아세안) 내 베트남 비중이 지난해 기준 42.9%까지 커졌다. 뿐만 아니다. 누적 투자액(42.6%)과 인적 교류(28.7%)의 아세안 내 비중도 1위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올해 첫 정상 외교 대상으로 베트남을 고른 건 치솟은 베트남의 위상을 인정한 결과다. 3월 국빈 방문 형식으로 베트남을 찾아 쩐 다이 꽝 국가주석과 만난 문 대통령은 9월 꽝 주석이 별세했을 때 이낙연 국무총리가 단장인 정부 조문단을 파견해 극진한 예를 갖추기도 했다.

이렇게 공을 들이는 건 무엇보다 베트남이 여전히 성장 중인 우리 시장이어서다. 지난달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산하 신남방정책특별위원회는 2020년 대(對)베트남 수출 규모가 유럽연합(EU) 지역 전체(영국 포함 28개국) 대상 수출액을 넘어서리라고 전망했다. 청와대가 논란 소지를 무릅쓰고 외교관 출신이지만 이미 2013년 삼성전자로 자리를 옮긴 김도현씨를 올 4월 주(駐)베트남 대사로 발탁한 것도 경제적 성과를 염두에 둔 인사라는 게 외교가의 대체적 분석이다.

북한이 보내는 신호는 더 노골적이다. 지난달 29일부터 3박 4일 일정으로 이뤄진 리용호 북한 외무상의 베트남 방문은 베트남의 개혁ㆍ개방 정책인 ‘도이머이’를 배우는 게 핵심 목적이었다. 도이머이는 1986년 베트남 공산당 제6차 대회에서 채택된 슬로건인데, ‘쇄신’이라는 의미다. 이를 토대로 베트남은 공산당 일당 지배 체제를 유지하면서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식의 국가 경제 발전을 도모했다.

베트남 현지 매체에 따르면 리 외무상은 1일 1시간가량 진행된 베트남 총리와의 비공개 면담에서 도이머이 아래 30여년 간 어떻게 베트남 공산당이 사회주의 지향 시장경제 토대를 건설하고 국민 삶의 질을 개선했는지를 가장 궁금해했다고 한다. 방문에 앞서 이미 “베트남의 경제 발전 모델을 배우고 싶다”는 뜻을 그가 전달한 듯하다는 게 대북 소식통 전언이다. 출장 기간 그가 둘러본 곳이나 만난 사람들 역시 베트남의 발전 노하우를 익히는 데 필요하냐를 기준으로 섭외됐다.

베트남의 환심을 사기 위해 북한이 쏟은 정성은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난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이복형 김정남이 독살된 사건에 베트남 여성이 연루되고 암살 사주 용의자 중 한 명으로 리홍 전 주베트남 북한 대사의 아들이 지목되자, 그렇잖아도 잇단 북한의 핵ㆍ미사일 도발에 따른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와 한국과의 교류 탓에 서먹했던 북한과 베트남 간의 관계가 더 냉랭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갈증을 더 느끼는 쪽은 북한이었다. 대미 비핵화 협상에 나서기로 마음먹고 올 4월 경제 건설에 매진하겠다고 공식 선언한 북한 입장에서 베트남은 반드시 예전 관계를 복원해야만 하는 나라였을 것이다. 베트남 현지 사정에 밝은 외교 소식통은 최근 기자들과 만나 “북한이 김정남 암살 사건에 베트남 여성을 끌어들인 데 대해 뒤늦게 비공식적으로 유감을 표명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베트남 정부가 이를 확인해주지 않았고, 사과 사실 자체가 암살 배후 자인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에 ‘설마 북한이 그랬겠느냐’는 의심이 적지 않지만, 전향적인 북한의 올해 태도를 감안할 때 개연성이 아예 없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분위기다.

실제 베트남은 북한이 흉내내볼 법한 나라다. 대북 비핵화 협상이 난항하자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7월 베트남을 찾은 김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기회를 잡는다면 미국과의 정상적 외교관계와 번영으로 가는 베트남의 길을 따라갈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제언하기도 했다. 6ㆍ25전쟁으로 미국과 척진 북한처럼 베트남전을 거치면서 미국의 적대국이 됐지만 실종 미군 유해 송환에서 출발해 제재 해제와 국교 수립으로 나아간 뒤 급속한 경제 발전 가도를 달리고 있는 베트남의 선례를 ‘성공 사례’로 제시한 것이다.

북한 경제 전문가들도 베트남 개혁ㆍ개방 모델에 주목한다. 양문수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지난달 한 심포지엄에서 “베트남 모델은 체제 유지 및 경제 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어하는 북한이 선호할 만한 모델”이라며 “중국은 강대국인 반면 베트남은 약소국이고 외부 자본, 특히 해외원조 의존도가 매우 높았다는 점에서 객관적 여건상으로도 북한은 중국보다 베트남에 가깝다”고 분석했다.

리용호(왼쪽) 북한 외무상이 1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응우옌 쑤언 푹 베트남 총리를 만나 악수하고 있다. 하노이=연합뉴스
리용호(왼쪽) 북한 외무상이 1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응우옌 쑤언 푹 베트남 총리를 만나 악수하고 있다. 하노이=연합뉴스

불안감

구혼자가 여럿인 게 즐겁지만은 않다. 특히 돌아온 ‘옛사랑’ 북한이 베트남으로서는 버거울 법하다. 연민으로 도왔다가 지금 자국에 꼭 필요한 한국을 자칫 빼앗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몇십년 동안 헤어져 있기는 했지만 남북한은 수천년 간 동거해 온 사이다. 미묘한 삼각관계가 만들어진 셈이다.

북한에게 베트남이 경제 협력 및 벤치마킹 대상이듯 베트남 입장에서는 한국이 투자국이자 성장 모델이다. 문희상 국회의장 초청으로 최근 방한한 응우옌 티 낌 응언 베트남 국회의장은 7일 ‘한ㆍ베트남 투자ㆍ무역 포럼’ 기조연설에서 “한국은 베트남의 최대 투자국으로, 베트남의 경제 구조 개선과 일자리 창출, 무역 균형화, 사회 안전 보장 등에서 두루 지대한 공헌을 했다”며 “베트남 국회는 한국 기업 등 외국인 투자자에게 최적의 경영 활동 환경을 마련해주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3월 착공식 뒤 베트남에 세워지고 있는 ‘한국ㆍ베트남 과학기술연구원’(VKIST)은 2014년 베트남 정부가 한국의 과학기술연구 기반 산업화 모델을 도입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하면서 설립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2020년까지 3,500만달러(397억여원)가 투입되는 대규모 과학기술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이다. 베트남 공장에서 연간 1억5,000만대가량의 스마트폰을 생산 중인 삼성전자가 고용하고 있는 현지 직원만 1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베트남 정부의 불안감을 자극하는 건 날로 커지고 있는 원심력이다. 문 대통령은 9월 초 소집한 당정청 전원회의에서 적폐 청산, ‘함께 잘사는 경제’와 더불어 “한반도의 완벽한 비핵화와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그 토대 위에서 한반도 경제공동체라는 신경제지도를 그리는 것”을 소명으로 언급했다. 대북 제재 완화 이후 본격화할 국제 자본 간 대북 투자 경쟁에 대비해 선점을 위한 정지 작업을 우리가 시작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 조언이다. 한국 정부와 기업의 투자를 빼앗아갈 경쟁자로 베트남이 북한을 인식할 수 있게 만들 만한 여지가 남북관계 개선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생긴 셈이다.

과(過)집중 자체도 악재다. 한국 정부의 외교 다변화 기조에 비춰볼 때 베트남에 몰린 한국의 교역ㆍ투자를 아세안 역내 다른 국가 등으로 분산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이승엽 기자 s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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