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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간의 노숙생활 경험을 글과 그림에 담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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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간의 노숙생활 경험을 글과 그림에 담았죠”

입력
2018.12.15 04:4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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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지 ‘빅이슈’ 판매원 임상철씨 

 빅이슈에 끼워 나눠줬던 부록을 

 작품집 ‘오늘, 내일…’ 로 만들어 

 

임상철 씨는 "잡지 별책부록으로 에세이와 그림을 연재한 건 제 스스로, 독자들에게 ‘미술가 살겠다’는 일종의 약속이었다"고 말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임상철 씨는 "잡지 별책부록으로 에세이와 그림을 연재한 건 제 스스로, 독자들에게 ‘미술가 살겠다’는 일종의 약속이었다"고 말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2007년 개봉된 영화 ‘원스’의 여주인공이 꽃과 함께 팔았던 대중문화 잡지 ‘빅이슈’는 독특한 유통방식으로 잘 알려져 있다. 노숙인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취지로 1991년 영국에서 창간, 정가의 절반을 판매자가 갖는다. 이 잡지는 2009년부터 국내에서도 발행 중이다.

6년째 서울 마포구 홍대역 부근에서 이 잡지를 판매 중인 임상철(51)씨는 요즘 하루하루가 설렌다고 했다. 18년간의 노숙 생활 끝에 ‘빅판(빅이슈 판매원)’으로 돌아온 그가 생애 첫 작품 출간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내용은 자신의 일상을 에세이와 그림으로 표현해 독자들에게 건넨 57통의 편지로 채워진다. 57통의 편지는 빅이슈의 별책부록으로 무료 제공됐고 독자들로부터 예기치 못하게 얻은 관심도 불러 일으켰다.

최근 홍대역 근처에서 만난 임씨는 “처음에는 제 소개를 하려고 글을 썼고, 어릴 적부터 미술에 관심 있어 그 글에 그림을 그려 넣었는데 그 글이 인터넷에서 소개된 적 있다”며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 사람들이 노숙자 실상을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제 이야기를 통해 빅판, 노숙인들의 삶을 소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첫 작품 제목은 ‘오늘, 내일, 모레 정도의 삶’이다. 이 책에선 학창시절부터 순탄치 않았던 임씨의 가시밭길이 그대로 전해진다.

20년 가까이 노숙자로 살아왔던 임씨가 사회에 뛰어든 건 중학교를 졸업한 직후였다. 고아원 시절부터 후원자들에게 보내는 크리스마스 카드 그림을 도맡아 그렸고, 조각을 배우고 싶어 가구공장을 그만 두고 미술 조형물 제작공장에 들어갔다.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 여러 회사에서 각종 조형물 제작과 설치 기술을 배웠다. 하지만 외환위기가 닥치자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린 시절 누군가 던진 돌에 맞아 실명한 오른쪽 눈을 본 면접관들은 10분 이상 대화하려 하지 않았고 그는 전국을 돌면서 노숙생활에 들어갔다. 생계는 일용직 육체노동으로 이어갔고 잠은 쪽방, 찜질방, 노숙인 쉼터, 고시원 등에서 청했다. “2012년 연말 즈음이었는데, 주머니에 100만원 쯤 갖고 있었어요. 그 돈으로 한 겨울 지내려니 안 되겠더라고요. 직장을 알아보던 차에 빅이슈를 알게 된 거죠.”

하지만 그는 미술작가로서의 숨겨진 재능을 이곳에서 찾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제지 공장인줄 알고 들어갔는데 잡지회사였던 이 곳에서 자신의 밑바닥 인생을 그려보기로 한 것. 판매원이 된지 두 달째부터 노숙생활에서 겪은 기억을 더듬어가며 ‘연재’를 시작했다. 노숙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 노숙생활과 인력 사무소, 건설현장에서 겪은 에피소드, 잡지를 팔며 스쳤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2주일에 한 번씩 소개했다. “사실 임대주택 입주하면 (판매원을) 그만두려고 했어요. 한데 막상 임대아파트에 입주하고 나니 어린 시절의 미술가란 꿈이 생각나더라고요. 잡지 파는 틈틈이 그림을 그려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충분히 이룰 수 있는 꿈이라고 생각했죠.”

임상철씨가 구독자 자녀를 그린 그림을 들고 있다. 손으로 그린 그림은 일일이 복사해 잡지 구독자들에게 '별책 부록'으로 배포한다. 신상순 선임기자
임상철씨가 구독자 자녀를 그린 그림을 들고 있다. 손으로 그린 그림은 일일이 복사해 잡지 구독자들에게 '별책 부록'으로 배포한다. 신상순 선임기자

노숙인 쉼터, 시장 풍경, 단골의 아이 등 스쳐가는 풍경이 전부 그림 소재가 됐고 역시 2주에 한번씩, 임씨가 잡지를 파는 구역에서만 ‘별책 부록’으로 연재됐다. “(판매구역이) 홍대 근처니까 미술학도들이 많잖아요. ‘갤러리 서울’이라는 화랑 운영하는 젊은 친구들이 제 잡지를 샀다가 그림보고 전시회를 제안했어요. 덕분에 전시도 두 번 했죠. 올 7월에는 장애인 미술협회 회원도 가입했어요.”

난생 처음 해보는 책 출간도 임씨에게 잡지를 산 편집자가 글 솜씨를 보고 제안했다. 임씨는 “제 글이 거칠고 투박하다. 길거리에서 20년 가까이 살았는데 좋은 얘기만 쓸 수는 없지 않나. 인력 사무소에서 치고 박고 싸운 얘기 같은 것도 썼는데 노숙인 전부를 그렇게 오해할 것 같아 우려되는 점도 있다”고 말했다. 1년여 글을 다듬어 나오는 책은 출간 전 크라우드펀딩 사이트 텀블벅(https://www.tumblbug.com/bigissue)을 통해 후원 행사를 열고 수익금 일부를 임씨가 후원하는 여성노숙인 요양시설 ‘서울시립영보자애원’에 기부한다. 임씨는 “이 나이가 돼도 세상살이를 잘 알지 못하지만 ‘선한 기운은 선한 기운을 퍼트린다’는 사실만은 믿고 있다”며 “이 책이 어쩌면 또 다른 빅이슈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전했다.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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