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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나를 찾기 위한 것”… 조선 문장가들의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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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나를 찾기 위한 것”… 조선 문장가들의 시학

입력
2018.12.14 04:4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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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다

정민 지음

문학과지성사ㆍ223쪽ㆍ1만3,000원

글 쓰기는 조선시대에도 난제였다. 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고민했다. 특히 정신을 압축해 담아내는 시의 작법은 시대의 고민이기도 했다. 조선후기에는 이러한 경향이 뚜렷해졌다. 이른바 ‘조선풍’이 떠오르면서 조선에서 시를 쓰는 일에 의미를 찾는 학자들이 늘어났다. 핵심 키워드는 ‘나’였다. 옛 것을 답습하는 대신 나만의 목소리를 담아 드러내는 시도가 두드러졌다. 그 선두에 섰던 인물이 허균(1569~1618)이다. 자유로운 사상가로 시대를 앞서갔던 그였지만, 시를 쓰는 일에서만큼은 스스로에게도 한치의 양보가 없었다. 저자인 정민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는 “시를 쓰는 목적은 이백과 두보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서”라 말한 허균의 고뇌를 짚어낸다. 중국 당나라의 최고 시인으로 추앙 받는 이백과 두보의 글을 흉내 낼 것이 아니라 자신의 참 목소리를 담아야 한다는 의미다.

허균의 시를 향한 이상은 끝이 없었다. 당시 한시의 대가이자 허균과 그의 누이 허난설헌의 스승인 이달(1539~1612) 선생은 그런 허균과 한시에 대해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옹께서는 저의 근체시가 매끄럽고 엄정하여 성당의 시가 아니라 하여, 물리쳐 돌아보지 않으시면서, 유독 고시(古詩)만은 좋다면서 안연지와 사령운의 풍격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는 옹께서 얽매여 변화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그려. 저의 고시가 비록 예스럽기는 해도, 이는 책상에 앉아 진짜처럼 흉내 낸 것일 뿐이니, 남의 집 아래 집을 얹은 것이라 어찌 족히 귀하다 하겠습니까? 근체시는 비록 훌륭하지는 않아도 절로 저 자신만의 조화가 있습니다. 저는 제 시가 당나라 시와 비슷해지거나 송나라 시와 비슷해질까 봐 염려합니다.”

허균은 이달 선생에게 보낸 편지 ‘여이손곡’에서 자신의 시가 중국 성향을 따르지 않았다고 해서 평가절하된 것에 일침을 가한다. 나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냈으니 거짓된 시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듯하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한 발 더 나아간다. “좋은 시를 쓰고 싶으면 좋은 생각을 먼저 품어라”며 정신을 강조한다. 시를 향한 다산의 소신은 한결 같다. 문장을 배우고 싶다는 한 청년에게 “말의 꽃이 시라면 말의 열매는 그 안에 담긴 내용이지. 꽃이 곱게 피려면 무엇보다 뿌리의 영양이 좋아야겠지. 뿌리가 약하면 고운 꽃을 피울 수가 없어”라고 조언하고, 제자들에게는 “시란 뜻을 말하는 것이다. 뜻이 본시 낮고 더러우면, 비록 억지로 맑고 고상한 말을 해도 이치를 이루지 못한다”는 명언을 남긴다. 저자의 말처럼 정약용은 “뜻이 서야 시가 산다”고 믿었다. 좋은 시를 위해선 ‘나’의 삶의 태도까지 닦아야 한다는 깊은 깨달음이었다.

책은 허균, 정약용과 더불어 이용휴, 성대중, 이언진, 이덕무, 박제가, 이옥까지 조선후기 명문장가 8명의 시학을 전한다. 단 한 줄의 시도 쉽게 쓰여지지 않았음을 역설한다.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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