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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말과 국가의 품격

입력
2018.12.11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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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는 헌법상 국민을 대표하는 단체이며, 법을 만드는 입법기관으로, 국회의원으로 구성된다. 침략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없는 일본을 바라보는 것조차 불편한 현실인데 국회에서, 국회의원의 입을 통해 우리말 표현 대신 버젓이 일본어 표현을 들어야 하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이 국회의원은 지난 8월에는 일본어 표현인 교감을 부교장으로 바꾸자는 교육관련법 개정안 발의를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분빠이(분배), 겐세이(견제), 야지(야유) 같은 일본어식 표현을 마구잡이로 하는 걸 보면 국회의 격이 말이 아니다.

선진국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모국어를 사랑하고 아끼는 노력을 등한시한 나라는 하나도 없다. 노르망디의 윌리엄에게 정복된 영국도 과거 150년 동안은 프랑스어가 공용어였다. 어둠 속으로 침몰한 영어는 헨리 4세가 즉위하는 1399년에 이르러 공식 모국어가 된다. 이후 수많은 언어학자와 작가가 주축이 되어 모국어인 영어를 다듬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잘 아는 옥스퍼드 사전은 수천 명의 학자가 70여 년에 걸쳐 만든 언어학의 금자탑이다.

프랑스가 자국어를 지키려는 노력은 가히 다른 나라의 추종을 불허한다. 루이 13세 프랑스 국왕은 1637년 왕립 기관을 설립하고 프랑스어 사전과 문법책을 만들도록 지시한다. 이 사업은 50년에 걸쳐 사전초판을 간행하게 된다. 수백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사전을 다듬고 수정하는 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언어학자가 주축이 되어 창설한 프랑스어 조사국은 불필요한 외국어와 저속한 언어를 걸러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1975년 프랑스 정부는 언론 매체에서 영어 단어를 쓰지 못하도록 했으며, 1994년에는 정부 지원을 받는 대학에서는 프랑스어만 사용한다는 투봉법을 통과시켰다. EU 정상회담에서 프랑스 경제인이 프랑스어 대신 영어로 연설하자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시라크가 동행한 대표단과 함께 회의장을 떠난 일화는 유명하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대서사시 파우스트를 집필함으로써 프랑스어와 영어에 눌려 있던 독일어를 섬세하고 고귀한 언어로 바꿔 놓았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민심과 수많이 나누어진 작은 연방이 비스마르크 철혈수상에 의해 통일되고 정부와 지식인들은 외래어 배격 운동과 함께 독일어를 아름답게 다듬는 일에 몰두한다.

1945년 일제의 음울한 치하에서 벗어난 뒤 최고의 인기도서는 외솔 최현배 선생이 기술한 ‘우리말본’이었다 한다. 우리말본은 외솔의 10년에 걸친 걸작으로 한국어 어법과 문법을 정리해서 1937년에 발간되었다. 일제 치하에서의 우리말에 대한 외솔의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사전편찬사업은 현재까지도 한글학회의 중요한 사업 중 하나다.

언어의 가치는 다른 언어들 속에서 솎아내며 자신의 순수함을 지켜내야 비로소 완성단계에 접어든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국가가 욕설과 비속어를 멀리하고, 아름답고 쉬운 말을 찾으려 노력하며, 외래어는 될 수 있는 대로 섞이지 않게 함으로써 자기 고유의 말과 글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 말과 글에는 그 나라의 품격과 혼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정인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글학회 홈페이지에는 우리말 큰사전이 데이터 수정 보완 및 경제 사정으로 인해 개발이 중단되었다는 공지가 빨간 글씨로 나온다. 우리말을 지키고 가꾸려는 행위에 경제 사정이라는 이유는 이해의 범위를 넘어선다. 국가가 지키지 않는 국어는 발전은커녕 도태되기 십상이다. 외래어와 비속어, 그리고 막말이 난무하는 수준 낮은 국회와 국회의원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엄치용 자유기고가ㆍ미국 코넬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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